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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일기]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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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4-14 | 조회조회수 : 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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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완연한 봄의 한가운데, 세상은 온통 새로 피어나는 꽃들과 싱그러운 초록으로 가득 차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계절에 시인 T.S. 엘리엇은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차라리 겨울은 따뜻했으니...  

<황무지>


따스한 햇살과 꽃망울이 터지는 이 4월이 왜 가장 잔인한 달일까요? 


이번 주, 이곳 시카고의 날씨도 갑작스러운 봄의 따뜻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쏟아지는 햇볕이 참 좋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돌보던 호스피스 환자 한 분은 4월 들어, 오히려 상태가 악화되어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고비를 맞이했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 남편 곁에서 꼬박 며칠 밤을 지새우던 아내분이 잠시 창밖을 바라보시더군요. 그러더니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셨습니다. "이 좋은 날, 남편과 함께 봄 향기를 맡으며 산책을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인은 모든 것을 망각하게 해주는 '겨울'이 차라리 따뜻했다고 말합니다. 4월의 봄비가 잠든 뿌리를 억지로 깨워 생명의 고통을 직면하게 하듯, 창밖의 눈부신 생동감은 병실 안 아내분에게 남편과 다시는 누리지 못할 일상에 대한 상실감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만물이 되살아나는 이 계절에 역설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이별의 순간, 그것이 바로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 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목들은 이 찬란하면서도 잔인한 4월의 현장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진실을 동시에 붙잡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봄의 향긋한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병실 안에서 흐르는 깊은 슬픔의 무게를 오롯이 존중하는 것, 그것이 저희의 소명입니다.


억지로 "기운 내세요"라고 말하기보다, 지금 이 햇살이 누군가에게는 왜 그토록 견디기 힘든 통증이 되는지를 묵묵히 헤아리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저 그 자리에 함께 머무는 것만으로도, 그 무거운 마음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4월을 가장 잔인하게 느끼는 이들의 동반자가 됩니다.


시인은 4월에 추억과 욕망이 뒤섞인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봄볕이 너무 밝아 오히려 눈을 감고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 속으로 숨고 싶은 이들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4월이 왜 그토록 잔인한지를 이해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쉼터가 될 수 있습니다. 봄 햇살이 너무 좋아 혹여 눈이 부신 이들이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도 그들에게 쉴만한 그늘이 되어주기를 소망합니다.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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