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성스러움을 넘어 거룩함으로
페이지 정보
본문
고교 동창 사이트에 올라온 봄나들이 소식을 보니 고국의 친구들이 참 부럽습니다. 올봄은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파피꽃 구경 한 번 못 하고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순박한 고교 시절에 부르던 “아 목동아(Danny Boy)”를 흥얼거려 봅니다. 음악책에 실렸던 이 아일랜드 민요는 봄날의 목동들이 양 떼를 몰고 푸른 계곡과 산등성이를 넘는 풍경을 눈앞에 그려줍니다.
그런데 노래 가사 중 “나 자는 곳을 돌아보아 주며 ‘거룩하다(Ave)’고 불러주어요”라는 대목은 오랫동안 수수께끼였습니다. 죽은 이의 무덤을 향해 왜 ‘거룩하다’고 말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 ‘아베(Ave)’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깊은 의미를 담은 ‘인사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아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건넨 “평안할지어다, 은혜를 받은 자여(Greetings, O favored one)”라는 인사의 라틴어(Ave, gratia plena!)에 바로 이 ‘아베’가 쓰였습니다.
‘아베’는 매우 특별하고 장중한 인사입니다. 천사가 수태한 마리아에게 드린 경탄의 인사이자, 신하와 백성이 황제에게 “아베 카이사르!”라고 외치던 예우의 언어입니다. 이렇게 보면 고교 시절 무심히 부르던 그 노래는 사실 조국을 위해 전쟁터로 아들을 보내는 부모의 비장한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네가 돌아오거든, 우리 무덤을 향해 ‘안녕하세요’, ‘평안하신가요’ 안부를 물어봐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가 그의 무사 귀환을 간절히 바라는 애틋한 기원인 셈입니다.
고국은 휴전 중이지만, 제가 사는 이곳 미국은 전쟁 중입니다. 다만 전쟁터가 본토가 아닌 중동이기에, 당장은 높은 기름값과 경제적 어려움이 더 큰 걱정거리입니다. 하지만 존엄한 생명이 무더기로 스러져 가는 비극 앞에서, 생활고를 운운함이 때론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대니 보이”를 중동과 세계 곳곳으로 보낸 부모들의 심정, 그리고 지금도 전함과 항공기 위에서 긴박하게 작전을 준비하는 군인들, 그리고 순간에 폭격과 미사일에 쓰러지고 죽어가는 중동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기름값에 투덜대던 마음이 미안합니다.
현상적으로 볼 때 전쟁은 압도적인 폭력의 전시장입니다. 적군을 살해하거나 무력화하여 전쟁 의지를 꺾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적진에 고립된 공군 장교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항공기와 특수부대, 첨단 장비가 동원되는 것을 보면, 그 치밀함과 능력에 놀라게 됩니다. 성공적인 구출 작전은 흡사 준비된 예식 같고, 그에 동원된 막대한 인력과 자원은 성스러운 예배를 위해 바쳐진 제물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23-2015)는 ‘폭력과 성스러움’의 상관관계를 날카롭게 간파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모방 욕구가 갈등을 낳고, 갈등하는 공동체가 폭력성을 해소하기 위해 ‘희생양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선택된 희생물은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 되고, 그 희생의 대가로 잠시나마 폭력이 물러가고 평화가 유지됩니다. 이때 평화를 회복시킨 희생양은 ‘성스러운 존재(the sacred)’입니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나 트로이 전쟁의 제물로 바쳐진 아가멤논의 딸, 제단 위의 동물과 인간은 모두 ‘성스러운 제물’이었습니다.
인류 문명사에서 전쟁은 거대한 제단이었습니다. 전장에 사람과 물질, 신무기를 끊임없이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화 속 폭력의 메커니즘을 연구하던 지라르는 복음서에서 예외적인 사건을 발견했습니다. 신화가 희생양을 성스럽게 포장해 폭력을 정당화한다면, 복음서는 희생양인 예수의 무죄함을 드러냄으로써 그를 죽이는 구조의 폭력성을 폭로합니다. 지라르는 이를 통해 학문적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성스러움’을 뛰어넘는 진짜 ‘거룩함’(holiness)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스러움(the sacred)’과 ‘거룩함(holiness)’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스러움은 인간의 탁월한 헌신이나 노력으로 만들어질 수 있지만, 거룩함은 오직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전자가 인위적인 제의의 결과라면, 후자는 신적인 성품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라는 수식어는 아무 곳에나 붙일 수 없습니다. 대의를 위해 싸우는 군인은 성스러울 수 있으나,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성스러움의 피안에 계신 거룩한 분입니다. 우리에게 “너희도 거룩하라”고 부르심이 신화와 대조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목사, KCMUSA 이사장)
- 이전글[키워드로 세상읽기] 양날의 검 ‘AI’ … 공공지능인가, 통제불능의 괴물인가 26.04.10
- 다음글[이상기 목사의 목양칼럼] 중국 사람인가요 일본 사람인가요? 26.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