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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세상읽기] 게릴라 가드닝…총 대신 꽃을 든 평화로운 유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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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3-20 | 조회조회수 : 7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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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나는 "와일드 플랜츠"라는 다큐 영화를 보며 깊은 울림을 받았다. 영상 속에서 감동을 받은 장면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했던 모리스 마기 영감의 씨앗 뿌리기 행동이었다. 삭막한 도심 풍경을 바꾸기 위해 그는 밤마다 자전거를 타고 도로변과 버려진 빈터에 씨앗을 뿌렸다. 


1984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인 2024년까지 무려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도시에 조용히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불법 행위였기에 인적이 드문 한밤중을 틈타야 했다. 그는 도심의 빈땅에 파종한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과정을 관찰하며 자신만의 은밀한 꽃밭 지도를 완성해 나갔다. 


90년대 중반, 그가 뿌린 씨앗들이 만개해 취리히의 상징적인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마침내 그의 행동은 단순한 일탈을 넘어 도시 예술이자 훌륭한 생태 운동으로 인정받았다. 콘크리트 틈새를 뚫고 꽃이 피어날 때, 그 생명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메마른 마음속에서도 무언가 따뜻한 것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그는 일찍이 체득하고 있었다.


그의 숭고한 실천은 결코 한 도시에 머물지 않고 전 세계적인 움직임으로 확장되고 있다. 1970년대 뉴욕의 리즈 크리스티에 의해 시작된 '게릴라 가드닝'이 바로 그것이다. 방치된 공터나 쓰레기 투기 지역 등 법적 권한이 없는 척박한 땅에 몰래 식물을 심고 가꾸는 이 활동은, 환경 보호와 도시 미관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평화로운 유격전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파괴적인 무기 대신 꽃과 식물을 들고 싸우며, 그들의 손에는 모리스 영감이 가볍게 쥐었던 단순한 씨앗을 넘어선 기발한 씨앗 폭탄이 들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 씨앗 폭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에서 농업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후쿠오카 마사노부(1913 - 2008)를 만나게 된다. 그가 오랜 연구 끝에 고안한 씨앗 경단은 진흙과 씨앗을 섞어 둥글게 빚은 후 말려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가 주창한 자연농법을 지탱하는 핵심 기술이다. 단단하게 굳은 진흙은 내부의 씨앗이 수분을 잃고 마르는 것을 방지하며, 새나 곤충으로부터 훌륭한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나아가 흙 속에서 자연스럽게 허물어지며 발아에 필요한 최적의 환경을 스스로 만든다.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하고 오직 자연의 힘을 빌려 황폐화된 토지를 녹화하려던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흙과 생명을 존중했던 농학자의 지혜가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 도시를 누비는 게릴라 가드너들에게 가장 강력하고 평화로운 무기로 재탄생한 셈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처럼, 스위스 노인의 씨앗 뿌리기와 일본 농학자의 씨앗 경단은 게릴라 가드닝이라는 흐름에 결합하여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멘트로 뒤덮인 회색 도시를 꽃이 만발한 정원으로 가꾸겠다는 사람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숨 쉬며 살만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굳은 의지는 쉼 없이 이어지고 있다.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게릴라 가드너들은 혁명가의 베레모를 쓰거나 전투복을 입지 않는다. 바람처럼 빠르고 조용하게 도심에 스며드는 이 그린 게릴라들은 누군가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싸운다. 정규군이 사령관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한다면, 이들은 저마다의 자발적인 동기를 품고 자신만의 아름답고 작은 전쟁을 묵묵히 치러낸다.


아스팔트 구석에 뿌려진 작은 씨앗 하나가 주변 풍경을 바꾸고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듯, 총 대신 꽃을 든 이들의 조용하지만 위대한 꽃밭 전쟁은 오늘도 진행 중이다. 척박하고 버려진 땅에 꽃을 피워내는 이들의 끈질긴 실천이 존재하기에, 전쟁 소식으로 얼룩진 이 세상이 여전히 살아갈 만한 곳인 것같다.


이재호(유튜브 ‘sbnr club’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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