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예수님과 맺은 50년 언약
페이지 정보
본문
얼마 전 아들이 가정을 꾸렸습니다. 작은 결혼식이었기에, 주변의 지인들을 별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아직 짐이 정리되지 않았는지 아들 부부는 아직도 저희를 초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사랑해준 며느리가 고맙습니다. 평생의 언약을 맺었으니 부부가 잘살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계약(contract)이라는 말보다 언약(covenant)이라고 흔히 표현합니다. 아무래도 계약은 다분히 거래의 성사를 표현하는 느낌이 강한 것 같습니다. 결혼을 언약(言約)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아마도 상호신뢰와 헌신을 언어로 결단하고 고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혼을 통해 존경과 사랑, 보호와 동행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서약하고, 그 상징으로 반지를 나누고, 이제는 부모를 떠나 독립된 가정을 이루며 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언약”이라는 말이 친숙한 이유는 신ㆍ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족장 시대 아브라함과 “횃불 언약”을 맺으셨는데, 아브라함이 쪼개 놓은 짐승 사이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십니다. 이는 ‘언약을 성실히 지키겠다’는 하나님 측의 행동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곧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백성 사이에 언약을 세웁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조건으로 삼아 약속하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신성한 결혼 관계에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에서 언약은 “베리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어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묶는다” “맺는다”라는 의미로 ‘상호관계를 형성한다’는 뜻이 크다고 합니다. 언약을 “맺는다”는 말은 “자른다” “가른다”는 의미로, 언약체결식에서 동물을 쪼개는 것처럼 “생명을 걸고 성실성을 지킨다”는 장중한 의미입니다. 언약이라는 말의 라틴어 또한 “포에두스”(foedus)라는 어원을 가지는데 이도 역시 “동의를 통해 묶는다” “언약하여 속박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연방을 의미하는 “페더럴”(federal)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언약 신학”(covenant theology)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연방 신학”(federal theology)라는 말과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창시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베푸십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성찬식으로 제정하셨습니다. 떡을 주시며 “내 몸이라” 그리고 잔을 주시며 “내 피로 세운 새 언약”(고전 11:23-26)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는 법칙을 따라, 우리는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속죄의 새 언약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처럼, 신약의 교회도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 자녀가 되는 “은혜언약”(the covenant of grace) 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언약 관계를 캘빈과 캘빈주의자들은 혼인, 사회관계, 국가 형성을 규정짓는 사회사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언약 신학, 연방 신학은 캘빈에서 정리되기 시작하여 장로교, 청교도, 개혁교회의 신학적 골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언약 관계의 형성은 청교도 목사 토마스 후커의 가르침과 로크, 루소, 흄 등의 사회계약론자를 따라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기반이 됩니다. 연방제라는 보다 평등한 정치체제도 이러한 언약신학의 소산입니다. 언약신학을 받아들인 개혁자들이 자유의 열광자가 된 것은 언약 당사자를 동등한 인격적 존재로 수용하는 전통 때문입니다.
5월이 오면 저는 예수님을 믿은 지 만 50년이 됩니다. 예수 안에서 교회를 만나고, 예수 안에서 결혼하고, 예수 안에서 공부하고, 목회하고, 예수 안에서 은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삶의 목표이자, 힘과 도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와 사랑을 저는 더욱 간절히 알기 원합니다. 50년이 지나고 백만 년이 지나도, 단 마음으로 언약의 주를 사랑하여 따르리라 결단합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 목사, KCMUSA 이사장)
- 이전글교회의 문턱 25.04.25
- 다음글[이상기 목사 목양칼럼] 사우스다코다주 래피디시티한인교회를 방문합니다 25.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