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세 종류의 사람: 덫, 닻과 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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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전하는 자의 즐거움은 새로운 깨달음에 있습니다. 감동을 주는 깨달음이 있으면, 그것을 전하기 위하여 주일의 새벽을 기다립니다. 저는 심히 부족한 설교자이지만, 지난주 하나님께서는 욥기의 결론부의 내용(욥 42:1-9)을 새롭게 보게 하시고 말씀을 기쁘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묵상하는 설교자에게 영적 통찰력을 허락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숙하는 것이 우리 삶의 소명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욥기라는 저작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통해 신앙의 성숙을 향한 지침과 과정을 펼쳐 보이십니다. 욥기에는 신앙의 논쟁에 참여하는 인물 5명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욥, 욥의 세 논쟁적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그리고 욥기 32-37장을 한꺼번에 쏟아놓는 지혜자 엘리후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다섯 명이 논쟁하는 것에 개입하여 38-42장에 걸쳐 결론을 내리심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이 욥처럼 의롭지 못하다고 영적 평가를 전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 친구의 잘못을 지적하시며, 그들이 욥에게 가서 욥과 같이 번제를 드리고 욥의 기도를 받으라고 지도하십니다. 욥은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므로 화해를 이루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바가 됩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이 언급하시지 않는 엘리후에 대한 해석입니다. 저는 욥이 엘리후에 대하여 반박하지 않음을 놀랍게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엘리후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적 영광의 임재와 가르침이 있기 전, 엘리후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토대를 제공합니다. 엘리후의 핵심적 가르침은 고난이 징계의 방법도 되지만, 성숙을 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엘리후의 주장은 그러므로 욥의 세 친구에 대한 반박이자, 욥의 고난에 대한 재해석입니다. 엘리후는 의로운 욥이 자신이 당한 고난을 부당하다고 주장함으로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을 공격한다고 바르게 비판합니다. ‘죄와 고난이 징계를 낳는다’는 일차원적 인과론(因果論, causality)에 매인 욥과 세 친구와 달리, 엘리후는 고난의 깊은 의미를 전달함으로 하나님의 등장을 미리 인도합니다. 즉 엘리후는 하나님의 현현을 우리가 예기(豫期)하도록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과 함께 논쟁자들을 세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세 친구는 욥의 재난을 괴로워하고 슬퍼했지만, 그들의 욥에 대한 정죄와 해석은 모두 틀렸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의 응보와 징계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욥에게 “괴롭게 하는 위로자”였습니다. 결국 욥의 재난을 오해하는 “덫”(traps)과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욥의 부르짖음과 신음의 이유는 의롭게 살아온 욥이 자신이 당한 고난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죄와 징계라는 틀로 자기 삶을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말씀에 기반하여 살아온 “닻”(anchor)과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욥에게 새로운 인생 해석을 위한 해석학적 전환의 기회를 부여합니다. 그 해석학적 상승은 놀랍게도 젊은 지혜자 “돛”(sail)과 같은 사람 엘리후를 통해서 왔습니다.
엘리후는 의인이 겪는 고난을 말합니다. 의인이 당한 고난은 죄악의 결과가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하시는 신적 성숙의 지름길이며, 우리를 경성하도록 하는 영적 확성기라는 사실을 외칩니다. 엘리후는 닻과 같은 욥에게 방향을 잡아 주는 돛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닻은 정박용이나 돛은 항해용입니다. 정치에서나 종교에서나 덫과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닻과 같은 부동의 의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역동적인 항해를 위해 돛의 역할을 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어지러운 교계나 정치계에 닻과 같이 성실하며 돛과 같이 지혜로운 지도자가 그립습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 목사, KCMUSA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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