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를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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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성자(Saints)가 있다면, 선교 현장에서 스스로 가난한 삶을 선택하여 헌신하는 우리의 선교사님들입니다. 한국의 깨끗하고 정리된 거리나 미국의 넉넉한 공간과는 사뭇 다른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를 보는 것 자체가 문화 충격입니다. 1억 7,000의 인구 모두가 다카에 모인 것처럼 아침이 시작되면 엄청난 활력으로 도시가 움직이고 소용돌이칩니다. 삶의 에너지는 그 외견상의 무질서 속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3번째 찾은 다카는 여전히 잘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우리의 귀한 선교사 이웅재ㆍ인미경 부부는 그곳에서 30여 년을 살며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삶의 질을 따지는 우리의 노력과는 대조적으로, 선교사님은 스스로 삶의 질을 낮추고 그곳 시장통에서 그 사람들과 동거하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당 주변의 쾌적한 환경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목회자의 당연한 방향성이지만, 다카의 변두리 ‘나라연곤즈’에 개척된 교회는 복마전과 같은 장바닥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였습니다. 전도자가 된 선교사님 부부는 그곳 힌두교도들을 위해 들어와, 가가호호 방문하는 축호(逐戶)전도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선교사님 부부의 본을 따라 전도사 3분도 함께 전도하며, 매일 저녁 예배드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주된 종교는 모슬렘입니다. 소수파로 힌두교가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선교사님은 소수파 힌두 문화권을 위하여 그들의 환경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시장통에 우상을 섬기는 곳이 있었습니다. 힌두교의 다신교적 우상이 가득한 곳에 호화롭게 꾸며진 여신들이 자리 잡고 있고,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우상은 장인의 상상력과 손끝에 의하여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보석처럼 박혀 살아가고 있는 나라연곤즈 교회의 성도들은 선교사님 부부와 전도사님을 보고 인사하고 즐거움을 나누었습니다.
선교사님과 저의 팀이 나누어 들어간 성도의 집은 깜깜했습니다. 저는 10평이 되지 않는 가정의 안방으로 몇 초 만에 이끌려 들어왔음을 알았습니다. 10명 정도가 되는 할머니, 그의 딸들과 손주들은 그 작은 집에서 모두 살았습니다. 차와 과자를 정성껏 대접하는 손길이 고마워, 과자를 여러 개 먹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강의와 설교를 유창하게 통역하시던 선교사님은 저의 기도도 통역하셨습니다. 저는 오래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삼 남매가 한 방에 살던 시절을 생각했습니다.
어김없이 “하나님이 방글라데시 다카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는 생각이 몰려왔습니다. 시장통에서 맑지 않은 물에 씻은 채소를 팔고 있는 사람이나, 파리가 붙은 잉어와 생선을 파는 상인이나, 맑지 않은 기름에 튀긴 과자를 먹는 사람 모두가 존엄합니다. 엄청난 숫자의 뚝뚝이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이나, 그 사이에서 인력거를 타는 다카의 사람들 역시 모두 존엄합니다. 열악한 환경은 변화되고 인생의 정신은 개혁되고 회심을 경험해야 하지만, 그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합니다.
방글라데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열악했던 70년 전의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상과 가난으로 내몰린 다카의 현재를 싫어한다면, 그렇게 살던 조선과 근대 한국의 역사를 싫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교사 부부는 이곳을 변함없이 사랑하셔서 30년이 넘도록 그들 사이에서 신학교를 운영했고, 거기서 회심한 전도사와 함께 다카의 빈민을 섬깁니다. 다카를 떠나며 주님께 묻습니다. “1억 7,000만의 불신 영혼을 어떻게 합니까?” “우상의 땅으로 선교사님을 보내놓고 기도를 중단하지 않는 것이 양심이 아니겠습니까?”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 목사, KCMUSA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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