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빙점』 21. 죄를 아는 듯하나 모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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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죄를 느끼면서도 죄를 모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하고, 두렵고, 어떤 일이 자기 잘못과 연결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빙점』의 나쓰에가 보여 주는 영혼의 구조입니다. 그는 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 앞에서 회개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나쓰에는 루리코의 죽음 앞에서 “천벌”의 감각을 느낍니다. 자기가 무라이와 함께 있던 시간, 어린 딸이 보호 밖으로 밀려났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 앎은 회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지 않고, 자기 고통을 요코에게 돌려줍니다. 『빙점 해동』은 나쓰에가 엄마라는 자리를 포기하고 여자 쪽을 선택한 순간을 비극의 시작으로 읽습니다. 사랑해야 할 자녀를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한 그 순간, 죄는 이미 삶 속에 드러났습니다.
최순육은 나쓰에를 “깨닫지 못한 자의 자기애와 오만”이라는 틀로 분석합니다. 게이조와 요코가 죄를 깨닫고 슬픔의 자리로 들어가는 인물이라면, 나쓰에는 죄를 감지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끝까지 깊이 보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죄책을 느끼지만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있으나 통회는 없고, 불안은 있으나 자기 부인은 없습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죄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죄책감은 자주 느낍니다. 마음의 불편함, 관계의 균열,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 자기 안의 어두운 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 앞의 죄로 부르지 않습니다. 대신 심리적 스트레스, 환경의 문제, 상대방의 잘못, 성장 과정의 상처로만 설명하려 합니다. 물론 그런 설명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를 죄라고 부르지 않으면, 회개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미우라 아야코가 말하는 죄는 단순한 도덕 규범 위반이 아닙니다. 최순육의 연구에 따르면, 미우라에게 죄란 창조주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신을 절대화하여 자기중심에 빠지는 상태입니다. 나쓰에는 바로 이 자기중심성의 인물입니다. 그는 루리코를 잃은 슬픔마저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고, 요코를 향한 잔혹함도 자기 상처의 이름으로 정당화합니다.
죄를 아는 듯하나 모르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 연민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내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아픈가”에 머뭅니다. 나쓰에는 자신이 루리코를 밖으로 밀어낸 어머니였음을 직면하기보다, 자기 수치와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요코를 미워합니다. 요코는 나쓰에의 죄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기 죄를 비추는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이 지점에서 『빙점』은 매우 복음적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죄책감을 더 강하게 느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죄를 하나님 앞에서 정확히 보라고 말합니다. 죄책감은 자기 안에서 맴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나님께 향합니다. 죄책감은 나를 더 방어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나를 낮아지게 합니다. 죄책감은 타인을 공격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상처 입은 사람에게 사과하고, 책임지고, 돌이키게 합니다.
나쓰에는 죄책은 있으나 회개는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녹지 않습니다. 죄를 느끼지만 죄를 고백하지 않는 영혼은 더 차가워집니다. 감정은 있지만 변화는 없습니다. 후회는 있지만 순종은 없습니다. 두려움은 있지만 십자가 앞에 서는 용기는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이 차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죄책감을 신앙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무겁다고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렸다고 반드시 돌이킨 것도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내가 상처 준 사람과 세계를 향해 책임 있게 돌아서는 일입니다.
나쓰에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죄를 아는 사람인가, 아니면 죄를 느끼기만 하는 사람인가? 내 불안은 회개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연민으로 굳어지고 있는가? 『빙점』은 조용히 말합니다. 죄를 아는 듯하나 모르는 영혼이야말로 가장 깊이 얼어붙은 영혼이라고. <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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