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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적대에서 교제로 여는 통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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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10-07 | 조회조회수 : 14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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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41주년을 맞이하여 교회가 파송한 수십 명의 선교사 부부를 초청하여 위로와 교제, 집회와 휴식의 시간을 나누고 있습니다. 세계 각처에서 수고하시는 분들을 직접 만나니, 함께 일하고 교제했던 기억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러나 선교지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억류된 선교사님, 사역 중 암 투병으로 세상을 떠난 선교사님을 생각하면 아픈 기억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물심양면으로 타민족을 돌보면서도, 2,500만 우리 민족이 처한 그늘진 현실을 떠올리면 마음의 부담은 더욱 커집니다.

   

남북통일은 지금 인기 없는 주제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통일을 정치적 협상이나 군사적 긴장 완화, 경제협력의 문제로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실현이 요원하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70년이 넘도록 서로 다른 체제에서 적대감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다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통일은 정치와 경제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과제입니다. 국제관계로부터 사람과 사람의 관계 회복까지 모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보다 접근하기 쉬운 ‘무너진 관계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요?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인정의 과정』(The Course of Recognition)에서 “상호인정”(mutual recognition)의 중요성을 제기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존재와 존엄, 권리와 가치를 인정받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무시당하거나 멸시받을 때 갈등과 증오가 생깁니다. 리쾨르는 이렇게 인정받기 위한 경쟁을 “인정 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남북 관계를 바라보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남과 북은 오랫동안 서로를 적대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적대적 갈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쟁의 상처와 분단의 아픔이 남아 있으며, 서로 다른 정치체제와 사회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무시하거나 열등하게 여긴다면 진정한 화해는 어렵습니다. 상대의 체제나 정책에 동의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인간적 존엄과 아픔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통일을 준비하려면 먼저 상대방 역시 존엄성을 지닌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리쾨르는 “인정 투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서로 “나를 인정하라”고 요구하기만 해서는 갈등은 끝없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투쟁을 넘어서는 “평화의 상태”(states of peace)를 말합니다. 이는 모든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이상적인 세계라기보다, 갈등 속에서도 서로를 인정하며 평화를 경험하는 작은 만남과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상호인정”입니다. 


이를 위해 남북 사이에도 작은 평화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산가족의 상봉, 인도적 협력, 문화ㆍ학술 교류, 공동의 역사와 언어를 연구하는 만남 등이 그 좋은 예입니다. 통일을 이룬 후에 비로소 만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만남과 상호인정의 경험을 쌓아가며 함께 살아갈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리쾨르는 더욱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합니다. 바로 무조건적 사랑인 아가페(agapē)와 상호인정을 표현하는 선물(gift)입니다. 모든 관계를 “네가 이것을 해주면 나도 이것을 해주겠다”는 계산으로 풀어간다면, 우리의 관계는 교제가 아닌 거래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선물은 다릅니다. 선물은 먼저 배려의 손길을 내미는 행위이며, 반드시 댓가를 돌려받겠다는 계산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감사(gratitude)로 응답할 때, 그 감사는 다시 새로운 선물과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현재 상황에서 국가가 앞장서 이러한 일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선단체나 종교단체는 좀 다릅니다. 서독 교회가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동독을 도왔던 것처럼, 정치적 갈등 속에서도 묵묵히 사회봉사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국가 간의 관계에서 정의와 안전, 인권과 책임을 무시한 무조건적 양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정의 없는 사랑은 불의를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행동을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만 계산한다면, 오랜 적대관계를 극복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정의를 지키면서도 때로는 먼저 손을 내미는 아가페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분단 시절 동독의 사례에서 그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1963년부터 통일 직전까지 서독 정부는 비밀리에 동독과 협상하여 약 3만 4천 명의 정치범을 석방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독일 교회는 초기 접촉과 협상, 물품 전달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이른 수많은 탈북민의 현실을 생각하면, 우리에게도 정치적 대립을 넘어 사람을 살리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길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단판의 정치적 사건만은 아닐 것입니다. 인정 투쟁에서 상호인정으로, 상호인정에서 화해로, 화해에서 교제로 나아가는 긴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가진 채 서로의 존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통일은 ‘과정’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서로의 존엄을 인정하고, 대화의 대상이 되며, 마침내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은 단순히 하나로 합치는 기술이기 전에,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 KCMUSA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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