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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오슬로에서 들은 북녘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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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8-13 | 조회조회수 : 18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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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밤새 배를 타고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당도한 때는 8월 13일 오전 10시였습니다. 점심을 먹고 오슬로 국립미술관을 찾았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20세기 표현주의의 선구자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작품들을 본 것은 여행사의 의미 있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뭉크의 대표작 《절규》의 진품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지만, 현지 가이드가 들려준 그의 작품세계와 《절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더욱 의미심장했습니다. 뭉크의 절규가 그만의 절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뭉크는 19세기 자연주의의 경직된 재현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을 표현함으로써 표현주의를 앞서 열어간 선구적인 화가로 평가됩니다. 나치 집권기에는 그의 작품들이 ‘퇴폐미술’로 규정되어 독일 미술관에서 철거되는 수난도 겪었습니다. 그의 작품세계에는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 등 암울한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인간의 비극과 우울, 그리고 시대의 아픔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질병과 죽음, 고독과 쾌락, 후회와 공포, 우울은 그의 그림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뭉크가 표현한 아픔의 정점에 《절규》가 있습니다. 국립미술관 소장판은 1893년 작품입니다. 뭉크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화면의 장소와 체험은 단순한 상상이 아닙니다. 오슬로 동쪽 에케베르그 언덕에서 피요르드(Fjord)를 바라보는 풍경입니다. 이 작품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자료는 뭉크 자신이 남긴 체험의 기록입니다. 뭉크는 두 친구와 길을 걷다가 해가 지면서 하늘이 갑자기 피처럼 붉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친구들은 계속 걸었지만, 자신은 불안에 떨며 멈춰 섰고 자연을 관통하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를 느꼈습니다. 《절규》는 바로 그 체험의 표현입니다.

   

이 기록은 몇 가지 해석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첫째, 그림에서 귀를 막고 있는 인물을 뭉크 자신의 체험이 투영된 존재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그가 소리를 지른다기보다 자연을 관통하는 처절한 절규를 듣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셋째, 그는 고통스러운 세상의 탄식을 들으며 귀를 막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공포를 표현합니다. 넷째, 함께 걷던 두 친구는 자연의 절규도, 친구 뭉크의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걸어갑니다. 인간 사이의 경험적 단절과 무관심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뭉크의 《절규》는 지금도 인간의 불안과 고독, 고난과 외로움의 현실을 일깨웁니다. 욥기에 나타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항변, 예레미야의 비극과 눈물과 조국의 멸망, 로마서 8장의 인간과 피조물의 탄식,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신 그리스도의 절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절규의 실제적 주체’로 다가오는 이들은 북녘의 동포들입니다. 사상과 양심, 종교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받고, 이동의 자유가 억압된 채 식량 부족과 영양실조, 인권 침해, 구금시설에서의 고문과 강제노동, 박해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절규》의 난간 위에 우리 민족을 놓아본다면 어떨까요? 북녘의 동포들은 사람의 얼굴인지 해골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일그러진 그림 속 얼굴처럼 극심한 공포와 고통에 눌려 있습니다. 더욱이 뭉크의 두 친구는 그의 괴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 무심한 인간 군상 속에 우리와 주변 나라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이웃을 피하여 지나가듯 친구의 비극과 괴로움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세는 쓰나미처럼 출렁이고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어 가는데, 위기를 알리는 외마디 함성은 작품의 침묵 속에서 들려옵니다.

   

로마서 8장은 피조물의 탄식(22절)과 인간의 탄식(23절)이 성령의 탄식(26절)과 그리스도의 중보(34절)를 통하여 하나님의 들으심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뭉크의 《절규》는 북한을 향한 이데올로기적 정죄에 앞서, 죄와 비참으로 얼룩진 인간이 드리는 짧고 절박한 기도를 생각하게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은 주님께 들려지고 응답으로 이어집니다. 


북녘 동포들이 겪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시 40:2)에서의 절규는 단순한 외침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죽음에 이르는 절망의 절규는 부활의 아침을 향해야 합니다. 출애굽의 해방, 욥의 회복, 예레미야가 예언한 포로 이후의 귀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절규 너머에 있는 성경의 소망입니다. 절규하는 북한과 무심한 우리가 함께 치유되고, 나아가 민족 공동체가 회복과 교제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이 절규를 들으며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일 것입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 KCMUSA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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