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 공중의 새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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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바야흐로 가수 김 세레나의 노래 ‘새타령’에 나오는 “온갖 잡새가 날아드는” 집이 되었다. 아침마다 출근하면서 딸은 우리 집 앞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새 모이통에 한 컵씩 새 모이를 채워주고 나간다. 그러면 아침 공중을 서성이던 새들이 죄다 우리 집으로 모여든다. 딸은 아예 새 모이를 포대 째 주문해서 ‘아마존’으로 배달시켜 놓았다. 우리 조상이 전생에 새였던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새들에게 공을 들이는 것이 이상하다 못해 묘하기까지 하다.
그뿐 아니다. 새 모이통으로 다람쥐가 달려들어 새 밥을 훔쳐 먹으니 이번에는 땅콩까지 사들이고 있다. 딸은 집을 나서면서 펜스 위에 땅콩 몇 개를 올려놓는다. 그러면 다람쥐가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지 낼름 나타나 땅콩을 해치운다.
우리 집 뒷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감이 익어갈 때마다 정신없이 감을 따먹는 다람쥐 때문에 나에게 다람쥐는 공공의 적이다. 그뿐인가. 골프 카트에 남겨놓고 티샷을 하고 돌아오면 간식으로 먹다 남긴 사과와 당근이 담긴 비닐 봉다리를 완전분해 한 후 속을 다 털어먹은 뒤 달아나 버린다. 동화책에 나오는 귀여운 다람쥐는 나에게 없다. 내게 다람쥐는 오직 귀찮고 해롭기 짝이 없는 적일 뿐이다.
그런데 딸은 날아다니는 새도 불러들이고, 다람쥐 먹이용 땅콩 포대까지 사들이고 있으니 나와는 틀려도 한참 틀린 인생관이다. 성 프란치스코도 아닌 마당에 온갖 잡새와 빌어먹을 다람쥐에게 마음을 주고 사는 딸이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집에서 키우는 ‘토이푸들’이란 손바닥만 한 강아지에게 딸이 들이는 정성은 가히 눈물이 날 정도다. 강아지 나이가 금년으로 열일곱 살이다. 사람 나이로 치면 백 살이 훨씬 넘었다. 강아지가 아프다고 하면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안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최근엔 눈에 안질이 생겼다고 4시간마다 약을 넣어야 한다며 엄마에게 꼬박꼬박 확인 문자가 날아온다. 집안에 있는 층계란 층계에는 모두 미끄럼 방지 깔개를 깔아 놓았다. 단백질 섭취를 위해 토끼 고기만 먹어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며, 2주에 한 번씩 LA 글로브 몰 옆 파머스 마켓으로 달려간다. 냉동 토끼를 사기 위해서다.
어떤 때는 어이가 없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짐승과 새들에게 마음을 열고 살아가는 딸아이의 여유와 너그러움이 부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민 와서 나는 너무 빠듯하게 살아왔다. 운전면허증을 갱신할 때가 오면 칼같이 갱신하고, 우표 값이 오른다고 소문 나면 ‘포에버 스탬프’를 사다가 쌓아 놓는다. 세금보고 마감 날짜를 넘기면 큰일 나는 줄 알고 4월 15일에는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 놓으며 살았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눈치 보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는 여유가 사라지고, 무엇인가 밀고 들어올 여백도 없는, 답답하고 긴장된 삶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이민자의 삶이었고, 동시에 나의 이민 여정이었다.
다람쥐는 손해를 끼치니까 쫓아버려야 하고, 잡새에게 모이를 줄 돈이면 아껴서 다른 데 쓰는 것이 낫다고 영악하게 계산하며 살아온 것이다. 애완견에게 쓸데없이 돈을 들이는 것도 사치스러운 낭비라고 생각하며 각박함에 짓눌려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딸을 보면서 '내가 살아온 방식이 꼭 옳았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너그러움도 없고, 받아들임도 없는 몰인정한 시선이 어느새 내 마음을 깡마른 허수아비처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그저 성경 구절로 머물러 있었다는 말인가? 백합화를 보고도, 공중의 새를 보고도 아무런 느낌 없이 지나치며 살아온 내 마음은 어쩌면 꽃 한 송이 피지 않는 빈들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 감수성의 문제다.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죄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이웃의 불행을 보고도 함께 울지 못하는 것도 마음의 감수성이 메말랐기 때문이다. 꽃 한 송이를 보고도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의 능력을 찬양할 줄 모른다면 감사의 감수성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람쥐를 보면서 아무 대가 없이 누리는 이 자연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피조물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창조세계에 대한 나의 영적 감수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너무 딱딱하고 완고하게 살아왔던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이제는 조금씩 내려 놓아야 마땅하다. 잡새에게도, 다람쥐에게도 마음을 열어보자. 나와 상관없는 존재라고 밀어내기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세상에 존재하도록 지으신 피조물로 바라보자.
그래서 노년을 잘 산다는 것은 더 많이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마음을 여는 것인지도 모른다. 열고 내려놓고 받아들이고. . . . 하나님 은혜가 임하는 곳도 바로 그런 곳 아니겠는가?
조명환 목사(크리스천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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