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22. 스노우 화이트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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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 곧 스노우 화이트의 유산은 한 마리의 고양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플로리다 키웨스트의 헤밍웨이 하우스 박물관에는 오늘날에도 거의 60마리의 다지증 고양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한 선장이 헤밍웨이에게 선물한 흰 여섯 발가락 고양이, 곧 스노우 화이트의 후손으로 전해집니다. 박물관은 고양이들 가운데 절반가량만 겉으로 여분의 발가락을 보이지만, 모두 다지증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작은 백설공주 고양이 하나가 한 작가의 집을 지나, 이제는 문학사의 살아 있는 풍경이 된 것입니다.
헤밍웨이는 전쟁, 사냥, 낚시, 투우, 바다의 작가로 기억됩니다. 그는 거칠고 강한 세계를 즐겨 그렸고, “파파”라는 별명처럼 남성적 권위와 모험의 이미지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 안에는 다른 리듬이 있었습니다. 고양이들이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그에게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곁에 머물고, 제 방식으로 다가오며, 인간의 세계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드는 작은 동반자였습니다.
헤밍웨이에게 돌려지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고양이는 절대적인 감정적 정직함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말은 헤밍웨이의 동생 레스터 헤밍웨이가 형에게서 들었다고 회고한 데서 널리 전해진 것이므로, 직접 저술 속 확정 인용이라기보다 신중한 귀속 표현으로 쓰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도 이 말은 헤밍웨이의 고양이 사랑을 깊이 비춥니다. 인간은 감정을 숨깁니다. 고통도, 두려움도, 외로움도 체면 아래 접어 둡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좋으면 다가오고, 싫으면 물러납니다. 기쁠 때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불편하면 몸으로 말합니다. 헤밍웨이는 그 솔직함에서 인간관계 속에서 자주 잃어버리는 어떤 순결한 진실을 보았을 것입니다.
고양이의 정직함은 그의 문체와도 닮았습니다. 헤밍웨이의 산문은 짧고 절제되어 있습니다. 감정을 설명하기보다 사물과 행동을 보여 줍니다. 울음을 말하기보다 상처 입은 손을 보여 주고, 절망을 논하기보다 다시 바다로 나가는 노인을 보여 줍니다. 그의 문장은 과잉을 싫어합니다. 고양이가 감정을 과장하지 않듯, 헤밍웨이의 문장도 감정을 장식하지 않습니다. 둘 다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숨기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쿠바 핀카 비히아의 고양이 이야기도 이 맥락에서 흥미롭습니다. 메리 웰시가 헤밍웨이를 위해 작업 탑을 세웠지만, 헤밍웨이는 주로 침실에서 서서 글을 썼고, 그 탑은 결국 고양이들에게 맡겨졌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가 보여 주는 것은 단순한 애완 취향이 아닙니다. 그는 고양이들에게 공간을 주었습니다. 오가게 했고, 쉬게 했고, 자기 방식대로 존재하게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 자신이 갈망했던 자유의 모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전쟁 통신원, 세계적 작가, 노벨상 수상자, 남성적 신화의 주인공으로 살았던 그는 고양이 앞에서 더 이상 “파파”만이 아니라, 안식을 필요로 하는 한 인간이었습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비 속의 고양이」에서 고양이는 더욱 깊은 상징이 됩니다. 비 오는 이탈리아 호텔, 무심한 남편, 이름 없는 미국인 아내, 그리고 비를 피하려는 작은 고양이. 이 짧은 이야기에서 고양이는 아내의 외로움과 취약함, 애정과 접촉에 대한 갈망을 비추는 거울처럼 읽힙니다. 고양이는 그저 동물이 아닙니다. 말하지 못한 결핍의 형상입니다. 비 속의 고양이를 데려오고 싶어 하는 마음은 사실 따뜻함과 친밀함과 돌봄을 갈망하는 인간 영혼의 작은 신호입니다.
심리비평적으로 보면, 스노우 화이트와 그 후손들은 헤밍웨이 내면의 부드러운 영역을 드러냅니다. 다만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헤밍웨이가 고양이에게 자신의 여성성, 어머니 이미지, 상처받기 쉬운 내면을 투영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그의 거친 외피 아래 숨은 연약함을 비추는 작은 거울이었습니다. 다지증의 넓은 발은 더 단단히 서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떠올리게 하고, 흰 털의 스노우 화이트는 더럽혀진 세계 속에서 순수한 위로를 갈망하는 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기독교 신학자의 눈으로 이 장면을 볼 때, 중요한 질문이 열립니다. 인간은 왜 피조물에게 위로를 구합니까? 왜 우리는 고양이, 개, 집, 책, 음악, 사람, 추억, 심지어 사역과 업적에까지 무조건적 사랑과 참된 안식을 투영합니까? 그것은 인간이 안식을 갈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고양이는 위로를 줄 수 있지만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동반자가 될 수 있지만 영혼의 최종 안식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숨겨 온 감정, 부끄러워한 상처, 강한 척하느라 말하지 못한 외로움을 그리스도 앞에 가져와도 된다는 초대입니다. 헤밍웨이가 고양이에게서 보았던 감정적 정직함은, 신앙인에게 기도의 정직함을 가르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강한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의 기도자들처럼 슬픔도, 분노도, 두려움도, 갈망도 주님 앞에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작은 고양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가면을 씁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답게, 교수는 교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리더는 리더답게 보여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자기 감정을 숨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위선적 강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정직한 약함을 은혜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강인함과 부드러움, 독립과 의존, 침묵과 고백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할 때, 인간은 비로소 온전한 동반을 배웁니다.
스노우 화이트는 헤밍웨이의 집에 들어온 작은 고양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생명은 한 작가의 내면을 비추고, 그의 문학 속 욕망과 고독을 드러내며,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백설공주는 누구입니까? 당신은 무엇에게 위로와 안식을 투영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서 안전하다고 느낍니까? 이 질문은 가볍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안식처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이 그리스도께로 향할 때, 우리는 헤밍웨이가 평생 갈망했던 참된 동행의 의미를 새롭게 듣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버리지 않으며, 끝까지 함께하시는 동행입니다. 작은 피조물의 체온은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물 너머에서 우리는 선물을 주시는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양이의 정직함은 우리에게 기도의 정직함을 가르치고, 피조물의 위로는 창조주의 위로를 향해 마음을 열게 합니다.
스노우 화이트의 유산은 단지 여섯 발가락 고양이들의 후손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헤밍웨이라는 거친 작가의 내면에 남아 있던 부드러움의 흔적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정직한 위로가 무엇인지 묻는 작은 표징입니다. 인간은 강한 척하며 살 수 있지만, 영혼은 끝내 참된 안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그 안식이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거친 바다도 아시고, 우리의 작은 떨림도 아십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오늘도 조용히 부르십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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