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21. 백설공주 고양이와 정직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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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고양이를 사랑했습니다. 키웨스트의 헤밍웨이 하우스에는 아직도 고양이들이 걷고 있습니다. 그들은 박물관의 장식물이 아닙니다. 한 작가의 삶이 남긴 부드러운 후손들처럼, 마당과 침대와 그늘 사이를 조용히 오갑니다. 헤밍웨이 하우스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현재 그곳에는 거의 60마리의 다지증 고양이들이 살고 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배의 선장이 헤밍웨이에게 선물한 흰 여섯 발가락 고양이, 곧 스노우 화이트의 후손으로 전해집니다. 다지증은 특정 품종이 아니라 여러 품종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형질이며, 박물관의 고양이들 가운데 절반가량은 실제로 여분의 발가락을 보입니다.
스노우 화이트, 곧 “백설공주”라는 이름은 이상하게도 헤밍웨이의 거친 이미지와 잘 어울리지 않는 듯 보입니다. 그는 전쟁, 사냥, 낚시, 투우, 바다, 남성적 모험의 작가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그의 집 안쪽에는 다른 풍경이 있었습니다. 거친 세계를 건너온 작가가 고양이의 조용한 발소리에서 안식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은, 헤밍웨이라는 인물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강한 사람도 위로를 필요로 합니다. 바다를 쓴 사람도 무릎 위의 작은 체온을 필요로 합니다.
헤밍웨이에게 돌려지는 유명한 말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고양이는 절대적인 감정적 정직함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자주 헤밍웨이의 말로 인용되지만, 그 출처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Quote Investigator는 이 문장이 헤밍웨이의 동생 레스터 헤밍웨이가 1961년에 출간한 회고에서 형에게 들은 말로 소개한 데서 비롯되며, 그 정확성은 레스터의 기억과 증언에 의존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문장을 확정된 문학적 선언이라기보다, 헤밍웨이를 둘러싼 하나의 의미 있는 전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이 말은 헤밍웨이를 이해하는 데 깊은 통찰을 줍니다. 인간은 감정을 숨깁니다. 웃으면서도 상처를 감추고, 강한 척하면서도 두려움을 숨기며, 품위라는 이름으로 외로움을 접어 둡니다. 헤밍웨이의 인물들도 자주 그렇습니다. 그들은 많이 말하지 않고, 울음을 설명하지 않으며, 고통을 장식하지 않습니다. 산티아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손이 찢어지고 몸이 무너져도 자기 고통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다 위에서 버티고, 낚싯줄을 붙들고, 다시 자기 길을 갑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다릅니다. 기분이 좋으면 다가오고, 싫으면 물러납니다. 두려우면 숨고, 편안하면 몸을 내맡깁니다. 고양이는 인간의 정치적 친절이나 종교적 위선을 배우지 않습니다. 자기 감정을 과장하지도 않고,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지도 않습니다. 헤밍웨이는 아마도 그 정직함에서 어떤 맑은 위로를 보았을 것입니다. 전쟁과 상처와 침묵을 아는 작가에게, 고양이의 작은 몸짓은 말 없는 진실이었을지 모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작은 피조물을 우상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찮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동물들의 이름을 부르는 존재로 세워집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소유의 폭력이 아니라 돌봄의 책임입니다. 헤밍웨이가 고양이들에게 유명 인사의 이름을 붙였고, 박물관도 그 전통을 이어 간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이 익명의 생물이 아니라 관계 안으로 들어온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께서 큰 바다의 생물뿐 아니라 작은 피조물에게도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신다고 노래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 밖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세계에서 작은 생명은 배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선 안에 있는 피조물입니다. 고양이를 사랑한 헤밍웨이의 모습은, 그의 문학 세계에 드리운 폭력과 죽음의 이미지 옆에 놓인 작은 생명 감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청새치와 상어와 바다의 거대한 세계 옆에, 한 마리 고양이의 조용한 숨결도 있었습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비 속의 고양이」에서도 고양이는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비 오는 날 밖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한 여인의 마음은 외로움과 친밀한 접촉에 대한 갈망을 드러냅니다. 그 고양이는 여인의 취약함과 고독, 그리고 정서적 연결을 향한 욕망을 비추는 작은 거울처럼 보입니다. 헤밍웨이에게 고양이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였지만, 동시에 인간이 말하지 못한 결핍을 드러내는 섬세한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도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많은 언어로 서로를 평가합니다. 믿음이 좋다, 약하다, 성숙하다, 부족하다, 성공했다, 실패했다는 말을 쉽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평가가 아니라 정직한 곁입니다. 고양이는 설교하지 않습니다. 해석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다가오거나, 조용히 머물거나,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 공동체는 그보다 더 깊은 사랑과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피조물의 정직함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사람 앞에서 얼마나 진실한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꾸밈없는가?
정직한 위로는 과장하지 않습니다. “다 괜찮다”고 성급히 말하지도 않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아프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정직한 위로는 상처를 상처로 인정하고, 눈물을 눈물로 존중하며, 침묵 곁에 머무는 일입니다. 헤밍웨이의 고양이들이 그의 집 마당을 조용히 걷듯, 신앙 공동체도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 곁을 조심스럽게 걸어야 합니다. 너무 큰 발소리로 다가가면 상처 입은 영혼은 더 깊이 숨어 버립니다. 사랑은 때로 조용한 발걸음을 배워야 합니다.
헤밍웨이는 바다의 작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에는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청새치와 상어와 노인의 상처를 쓴 작가 곁에, 스노우 화이트라는 흰 고양이와 그 후손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합적인지를 말해 줍니다. 강인함 속에도 부드러움이 있고, 침묵 속에도 위로를 향한 갈망이 있으며, 거친 문체 아래에도 작은 생명을 향한 애정이 있습니다. 인간은 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작가도, 성도도, 목회자도, 실패한 사람도, 상처 입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믿음은 인간을 더 진실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의 기도자들은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두려움도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척만 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탄식했고, 때로 항변했고, 때로 기다렸습니다. 어쩌면 고양이가 가진 “감정적 정직함”은 신앙인이 잃어버린 기도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꾸민 영혼보다 정직한 영혼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 정직한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은혜의 손길을 느낍니다.
스노우 화이트는 작은 고양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피조물의 후손들은 아직도 헤밍웨이의 집을 걷고 있습니다. 문학은 책에만 남지 않습니다. 때로는 발자국으로 남고, 이름으로 남고, 한 작가가 끝내 감추지 못한 사랑의 흔적으로 남습니다. 헤밍웨이의 바다는 크고 깊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 마당을 걷는 고양이들의 발걸음은 우리에게 또 다른 진실을 들려줍니다. 인간에게는 거대한 바다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작은 생명의 체온, 정직한 눈빛, 말없는 곁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그렇게 위로해야 합니다. 화려한 말보다 정직한 마음으로, 빠른 판단보다 조용한 동행으로, 상처 입은 사람의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참새도 기억하신다면, 교회는 작은 눈물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들짐승과 바다의 생물에게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신다면, 교회는 지친 영혼에게 은혜의 양식을 나누어야 합니다. 백설공주 고양이의 조용한 발걸음은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위로는 때로 작습니다. 그러나 진실할 때 깊습니다. <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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