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17. 바다로 나가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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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인이 바다로 나아갑니다. 배는 작고, 바다는 큽니다. 그의 손은 이미 늙었고, 몸은 젊은 날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다시 노를 젓습니다. 어제의 실패가 오늘의 항해를 멈추게 하지 못합니다. 『노인과 바다』의 첫 장면은 한 인간이 자기 일터로 돌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깊은 바다 앞에 서는 장면입니다. 실패의 기억을 안고도 다시 자기 소명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오래된 모습입니다.
헤밍웨이의 바다는 단순한 자연 배경이 아닙니다. 바다는 침묵합니다. 쉽게 길을 내주지 않습니다. 인간의 실력과 경험을 인정해 주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인간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산티아고에게 바다는 일터이지만 동시에 실존의 광야입니다. 그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다에서 자기 자신도 만납니다. 고독, 두려움, 인내, 소망, 실패, 존엄이 모두 그 깊은 바다 위에 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산티아고가 바다를 단순히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바다를 사랑합니다. 바다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외합니다. 바다가 주는 생명을 양식으로 받지만, 바다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자기 힘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어부입니다. 산티아고의 위대함은 바다를 지배한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바다 앞에서 자기 일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깊은 물 앞에서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바다에서 우리는 오늘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교회도 바다 앞에 서 있습니다. 세속화의 바다, 다음 세대의 바다, 이주민과 난민의 바다, 다문화 사회의 바다, 가난과 외로움의 바다, 전쟁과 불안의 바다, 디아스포라의 바다, 타종교와 무종교의 바다, 고령화와 소진의 바다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오늘의 세계는 얕은 물이 아닙니다. 교회가 익숙한 언어와 안전한 방식만으로 쉽게 건널 수 있는 작은 강도 아닙니다. 세계는 깊고 넓은 바다입니다.
교회는 항구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항구가 필요합니다. 배가 쉬고, 그물을 손질하고, 음식을 나누고, 상처를 치료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도 예배와 돌봄과 회복의 항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항구가 교회의 전부가 될 때, 교회는 자기 보존 공동체로 축소됩니다. 주님은 교회를 안전한 정박지에만 머물도록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따라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주체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은혜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복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구원의 소식을 싣고 세상으로 보냄 받은 배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증언을 맡은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항구에만 머물면, 배의 본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배는 바다 위에서 배답고, 교회는 보냄 받은 자리에서 교회답습니다.
저의 지도 교수인 찰스 밴 엥겐은 지역 교회를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 이해합니다. 교회는 선교를 여러 프로그램 중 하나로 가진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소명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으로부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외향적 운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종의 자리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징과 도구와 맛보기로 서게 됩니다. 교회는 선교를 소유하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백성입니다.
교회가 바다로 나간다는 말은 세상을 닮아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에 흔들린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과 삶으로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피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을 위해 보냄 받은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정복하는 군대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서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선교는 오만한 정복이 아니라 겸손한 증언입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자주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소로 등장합니다. 시편 107편은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들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본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폭풍 속에서 두려워합니다. 물결은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떨어지고, 사람의 영혼은 고난 때문에 녹아내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고통에서 건지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십니다. 바다는 인간 기술이 멈추는 곳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납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도 제자들은 풍랑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바다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폭풍 앞에서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묻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바다는 제자들의 불안을 폭로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권세를 드러낸 계시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바다는 두려움의 장소이면서, 주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의 어부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말씀은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을 부르셔서 단지 더 경건한 개인으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사람을 살리는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의 배와 그물, 노동과 경험을 하나님 나라의 사명 안으로 새롭게 초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일상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일상을 새 사명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선교신학적 상상력 속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성경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산티아고를 곧바로 성경의 제자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문학 작품 속의 노인 어부입니다. 그러나 그의 항해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는 깊은 물을 두려워하며 항구에만 머물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다시 바다를 향해 노를 저을 것인가?
우리는 많은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교인 수 감소, 다음 세대의 이탈, 사회적 신뢰의 약화, 목회자의 소진, 선교 동력의 약화, 세계적 정세 불안, 인공지능의 급습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교회의 선교적 부르심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시대일수록 교회는 자기 안위만을 위해 항구를 넓히려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항구를 멋지게 장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바다로 나가는 교회는 위험을 만납니다.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기대한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는 성공을 과시하기 위한 항해가 아닙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순종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증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자기 능력으로 바다를 건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증인이 됩니다. 교회의 힘은 노의 크기에 있지 않고, 바람을 주시는 성령께 있습니다.
교회는 먼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나를 따라오라.” 이 부르심이 사라지면 교회는 종교적 항구가 됩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이 살아 있으면 교회는 작은 배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배가 됩니다. 규모가 작아도 괜찮습니다. 노가 낡았어도 괜찮습니다. 손에 상처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의 명령을 따라 바다로 나가고 있는가입니다. 교회를 움직이는 것은 불안이 아니라 부르심이어야 합니다.
바다로 나가는 교회는 세상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여 숨어 있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죄와 상처를 분별하면서도, 그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기에, 교회도 그 사랑의 방향을 따라 세상으로 보냄 받습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 받은 제자의 길입니다.
산티아고가 다시 바다로 나아가듯, 교회도 다시 깊은 바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항구의 안전함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세상이라는 깊은 바다에서 우리는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다 위에는 이미 주님이 계십니다. 풍랑을 꾸짖으시는 주님, 제자들을 부르시는 주님, 성령으로 증인을 세우시는 주님이 교회보다 먼저 그 바다에 계십니다. 교회의 선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으로 모셔 가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 가운데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여, 다시 노를 저으십시다. 그물을 손질하십시다. 깊은 바다를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항구에만 머물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바다로 보냄 받은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 받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배는 작을 수 있습니다. 바다는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여전히 분명합니다. “나를 따라오라.” 그 음성 앞에서 교회는 다시 너른 바다로 나아갑니다. <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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