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목 일기] 이 시대 목사들은 에드워즈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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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일기와 개인 노트에는 그의 아내 사라 피어폰트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이 부부는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자면 MBTI 의 I와 E처럼 상당히 상극에 가까운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내향적이고 이성적이며 철저했고, 의지적으로 삶을 밀어붙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지 마스덴은 그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엄청나게 내향적이고, 절제되었으며, 사고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반면 사라 피어폰트는 외향적이고 자유로웠으며, 감성이 풍부했고 타인의 감정에 깊이 공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스덴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라 에드워즈는 특별한 감성 지능과 사회적 민감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현실에서 이러한 조합은 종종 서로의 다름에 강하게 끌려 불꽃 같은 사랑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다름이 갈등이 되어 쉽게 깨지기 쉬운 커플 유형이 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에드워즈와 피어폰트의 관계에도 그러한 위기의 순간들은 없었을까요.
1. 기묘한 첫 만남
에드워즈가 피어폰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스무 살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뉴헤이븐에 한 젊은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위대한 존재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보이지 않는 이 위대한 분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에게 오셔서 그녀의 마음을 말로 다 할 수 없는 달콤한 기쁨으로 채우십니다."
당대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이 상대의 외모나 가문을 먼저 따졌던 것과 달리, 에드워즈는 이 여인의 외모나 성격, 배경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자유롭고도 깊은 영성, 곧 하나님과 스스럼없이 교제하는 삶의 태도였습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녀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들판과 숲을 거닐곤 하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언제나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들판에서 홀로 웃으며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하는 열여섯 살 소녀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기묘하거나 불안하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것을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 장면에서, 자연 속에서도 혼자 있을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자유롭고 깊은 영성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사라 피어폰트는 젊은 에드워즈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습니다.
2.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쫓겨날 때
1744년에서 1748년 사이,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몇몇 유력 가문, 곧 안수집사 가정들의 청소년 자녀들이 함께 산부인과 도감을 돌려보며 흉내 내는 관음적 일탈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뉴잉글랜드 식민지 사회의 성문화를 고려하면, 이 사건은 짓궂은 청소년 일탈로 덮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를 부모 세대의 신앙 교육 부재로 보았고, 공적 조사를 통해 몇몇 안수집사에게 수찬 정지 권징을 시도합니다. 이는 교회 직분이 곧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던 뉴잉글랜드의 유지들에게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에드워즈에 대한 반대는 노골화되었고, 교회가 그를 몰아내기 직전, 화살은 그의 아내 사라에게로 향합니다. 전기 기록들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들이 떠돌았습니다.
“사모가 너무 감정적이다.”
“여성들에게 영향력을 과도하게 행사한다.”
“목사 가정이 검소하지 못하다.”
“사모가 살림을 못 한다.”
심지어 “비싼 그릇을 수입해 쓴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후대 연구자들은 이것을 교회 내 갈등이 ‘목사의 아내’라는 통로로 전이된 전형적 사례로 봅니다. 그러나 언제나 밝았고, 많은 여성들이 따랐으며, 열 명이 넘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환대를 멈추지 않았던 피어폰트의 삶은 반대자들에게 가장 쉬운 공격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마스덴은 말합니다. 목사의 공식 직분은 에드워즈에게만 있었지만, 실제로는 피어폰트가 목회의 절반 이상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집은 늘 열려 있었고, 학생들과 선교사들, 가난한 이웃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환대와 살림이 가능했던 것은 그녀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에드워즈는 우리가 종종 보아온 어떤 목회자들처럼, 아내를 나무라거나 조심하라며 거리를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시기에 남긴 기록에서 그는 아내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녀의 기쁨은 요란하거나 과장된 것이 아니라, 깊은 겸손과 온유함,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낮은 인식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아내는 이 어려움들 가운데서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으며, 조용하고 물러선 자세로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복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아내를 인정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 많고 정치적인 노스햄프턴 교회를 미련 없이 떠났습니다.
3. 부부의 다름이 축복이 될 때
20세기 초 한 가계 연구에 따르면, 에드워즈–피어폰트 부부의 후손 가운데에는 대학 총장 13명, 교수 65명, 목사 100명 이상, 판사 30여 명, 기자와 작가 약 60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통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녀를 어떻게 길렀는가일 것입니다.
놀랍게도 사라의 가정교육은 엄격하지 않았습니다. 체계적인 홈스쿨링이나 강한 규율보다, 삶의 리듬 그 자체가 교육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신앙을 설명하기보다, 신앙이 숨 쉬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저녁 식사 후 아이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쳤고, 사라는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심어주었습니다. 기도와 노동, 독서와 환대가 분리되지 않은 일상이 아이들에게 가장 강력한 신앙 교육이 되었습니다.
사라는 아이들을 통제하지 않았고 조급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각자의 기질과 속도를 존중했으며, 질문과 의심, 감정의 기복을 문제 삼지 않고 대화로 풀어갔습니다. 정형화된 영적 언어를 강요하지 않았고, 체험을 비교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만의 언어를 찾도록 기다려 주는 어머니였습니다.
한 번은 출장 중이던 에드워즈가 둘째 아들의 성경 읽기가 뜸해진 것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사라는 그 일로 아이를 채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이의 마음을 듣고, 하나님 앞에 자율적으로 서도록 기다려 주었습니다.
마스덴은 이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사라 에드워즈는 자녀들의 신앙을 통제하거나 성취해야 할 과제로 보지 않았으며, 참된 경건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역사하시는 일이라고 믿었다."
에드워즈의 질서와 사라의 기다림은 서로를 상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다름은 목회에서도, 자녀 교육에서도 서로를 보완하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척 달랐지만, 그 다름은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더 풍성하게 성취하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아내를 자신의 사역의 부속물로 축소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그녀를 헐뜯을 때에도 침묵 속에서 끝까지 그녀를 보호했고 사랑했습니다. 그녀의 영성과 삶의 방식을 통제하거나 견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다르다고 짜증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내의 다름을 사랑했고 존중했습니다.
에드워즈–피어폰트 가정이 남긴 가장 깊은 유산은, 위대한 신학이나 화려한 후손의 직업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존중하며 하나님 앞에 함께 서 있었던 한 부부의 모습일 것입니다.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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