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 월드컵, 국기 속의 십자가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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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가 지난 토요일 캔사스시티에서 열린 월드컵 8강전에서 스위스에게 진땀승을 거두고 4강에 진출했다. ‘메시의 나라’ 아르헨티나가 겨우 남미 축구의 자존심을 지킨 셈이다. 그러나 브라질, 멕시코, 미국, 캐나다, 컬럼비아 등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 축구에게 거의 완패한 셈이다.
지난 토요일에 벌어진 8강전은 잉글랜드와 노르웨이, 아르헨티나와 스위스가 맞서 싸웠다. 결과는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승리였다. 아시아 축구는 32강에서 죄다 막혀 버렸다.
그러다 보니 ‘폭스 TV’ 화면에는 자연스럽게 유럽 국가들의 국기가 자주 등장했다. 경기 시작 전 양국의 거대한 국기가 경기장을 뒤덮는 개막 퍼포먼스는 장관이었다. 순간 월드컵은 마치 "국기 박람회''처럼 느껴졌다.
8강전에서 만난 잉글랜드와 노르웨이의 개막행사가 열릴 때 거대한 2개의 십자가가 그려진 양국의 국기가 경기장을 덮었다. 흰색 바탕의 빨강 십자가가 그려진 잉글랜드의 국기 속 십자가는 세인트 조오지 십자가(St. George Cross)다. 노르웨이 국기는 왼쪽으로 약간 치우친 십자가다.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의 국기는 이처럼 모두 왼쪽으로 치우친 십자가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북유럽 십자가(Nordic Cross)’라고 부르는데 결국은 기독교 전통 속에서 형성된 역사와 국가 정체성을 상징한다.
유럽 나라들의 국기는 색깔은 비슷하지만 굵은 막대기가 여러 개 나열되어 있는 게 대부분이다. 예컨대 프랑스와 벨기에, 그리고 이탈리아는 색깔은 다르지만 세로 막대기다. 독일과 스페인은 가로 막대기다. 알고 보니 세로줄은 혁명과 시민정신을 상징하고 가로줄은 오랜 왕국이나 역사적 전통을 이어온 국가들이라고 한다. 프랑스 국기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3색기로 유명하다. 프랑스 혁명 때 파리시민들의 모자 장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국기엔 그 나라를 상징하는 복잡한 문장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유럽국가들의 국기 가운데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상징은 십자가다. 월드컵에서 국기는 단순한 응원도구가 아니다. 국기라고 하는 한 장의 천에는 수백년 역사와 종교, 혁명과 왕조, 바다를 개척한 항해정신과 민족의 정체성이 압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축구는 90분 만에 승패를 가르지만 국기는 수백 년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기에 새겨진 역사와 신앙의 유산까지 함께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근대 선교 역사상 복음을 세계로 실어 나른 일등공신은 단연 영국이었다. 우리가 영국이라 부르는 연합왕국을 상징하는 ‘유니온 잭’에는 무려 3개의 십자가가 겹쳐 있다. 앞에서 말한 잉글랜드의 성 조오지 십자가, 북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X자 모양의 성 패트릭스 십자가(St. Patrick’s Cross),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성 안드레 십자가(St. Andrew’s Cross)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지구촌 국가 가운데 세 개의 십자가를 한 국기안에 담은 나라는 영국이 유일하다. 무엇을 말하는가? 한 시대 영국이 지녔던 분명한 기독교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에 복음까지 함께 전했던 나라였다.
왜 유럽의 국기에는 아직도 이렇게 많은 십자가가 남아 있을까? 우리는 흔히 유럽을 놓고 ‘기독교가 무너진 대륙’이라고 쉽게 말한다. 물론 교회 출석률은 크게 낮아졌고 세속화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흔적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버렸다고 단정하기보다, 기독교가 공적 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예전과 달라졌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의 뿌리는 여전히 문화와 역사 속에 깊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번 월드컵 경기장마다 휘날리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 ‘너희 뿌리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상징은 ‘기억을 담는 그릇’이다. 국기는 국가가 스스로 잊고 싶어도 쉽게 바꿀 수 없는 역사와 정체성을 품고 있다. 유럽 사람들은 십자가를 잊어가고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는 아직도 십자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를 이번 월드컵 경기장에서 읽을 수 있었다.
월드컵이 끝나면 사람들은 우승국만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경기장을 뒤덮었던 수많은 국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어떤 나라는 자유를, 어떤 나라는 혁명을, 어떤 나라는 왕국의 전통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많은 국기는 오늘도 말없이 십자가를 품고 있다. 사람은 잊어도 상징은 기억한다.
이번 월드컵은 어쩌면 유럽 문명의 뿌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뜻밖의 역사 수업이었는지도 모른다.
조명환 목사(크리스천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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