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인가? 머슴인가?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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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제목을 가진 1편의 글에서
나는 지금이 예레미야의 끔찍한 시대라고 규정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궁극적인 타락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자들의 타락을 동반한다.
노아의 홍수 원인을 말씀하는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2)고 말씀한다.
앞글에서 인용했던 예레미야 5장 1절도
하나님 백성의 철저한 타락을 말씀한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한탄하신다.
예수님 재림의 성격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죄악이 관영했을 때 임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죄악의 관영은 하나님 백성의 타락을 전제한다.
하나님 백성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와 성도들을 남겨 놓으시고
그들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 빛은 흑암에 삼킨 바 되고
소금은 완전히 맛을 잃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미 그렇게 되었다.
교회는 시대정신에 매몰되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유는 "동방 풍속이 가득해서"(사 2:6)다.
예수 없는 세상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이다.
교회는 그런 세상에 하나님의 의와 공도(창 18:19)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와 공도만이 세상의 등이요 빛이다(참조, 시 119: 105).
그런데 세상 흑암과 사망의 그늘이 교회를 점령했다.
지금은 주님이 언제 오셔도 이상하지 않을 시대다.
이 시대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겨우 지탱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앞의 글에서 교육의 본질을 언급했다.
다니엘서 우상을 통해 보여준 금시대에는
적어도 교육의 본질이 '사람 만들기'였다.
그러나 진흙시대인 지금 교육의 목적은 '기능인'
즉 기계를 만드는 것이다.
원래는 사람이 우선이고 기능인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교육 목적의 모든 것은 기능인 양성이다.
인간성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다.
즉 교육 자체가 사라졌다.
위에서 말했듯이 교회가 시대정신에 매몰되었다.
교회의 교육도 세상 교육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세상 교육이 '기능인'을 목표로 하듯
교회 교육은 소위 '사역자'를 목표로 한다.
세상이고 교회고 존 듀이의 사상에 놀아나고 있는 형국이다.
'제자 훈련 유감'이라는 글에서 밝혔듯 선교회에서 시작되어
교회로 들어온 제자훈련의 목적은 '사역자 만들기'다.
이것은 성경과는 전혀 관계없는 목적이다.
성경이 그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오직 하나 '거룩'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 1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하나님 백성을 만드시는 이유는 소위 사역도 아니고 기능도 아니다.
출애굽, 더 나아가 인간을 만드신 이유 자체가 거룩이었다.
거룩해야 하나님 백성으로 존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거룩하지 못하다.
그래서 구원받은 후에도 성화(거룩해지는 과정)를 위해 싸워야 한다.
하나님 백성이 이 땅에서 자신을 위해 해야 할 모든 일은
오직 거룩에의 추구다.
다른 것은 지극히 부차적인 것이다.
아니, 안 해도 된다.
거룩해지기 위한 노력만을 해야 한다.
이 목표를 잊으면 안 된다.
물론 거룩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 분이 명령하는 것을 행하는 것도 거룩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역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을 추구하면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다.
거룩은 주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몸은 머리의 생각을 즉각적, 반사적으로 시행한다.
교회도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그렇게 이루어야 한다.
그 모습이 사역으로 나타날 뿐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균형이나 방향성을 잃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주객이 전도되고 목적과 방법이 뒤바뀐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 완전히 전도된 모습을 보고 있다.
그래서 시대정신에 매몰되고 세상 물결에 점령되는 것이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머슴이나 노예로 키우겠는가?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사랑방에서 차를 마시고 곶감을 먹으며
인생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다.
머슴은 그 시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마당을 쓸고 물을 길어온다.
이 그림을 이해하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소위 제자훈련은 마치 아들이 마당을 쓸고
물을 길어 와야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처럼 가르친다.
이것은 불행하게도 한국의 전통적 민족성과도 관계가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다.
그래서 그 말뜻 그대로,
마치 머리에 띠를 띠고 숨이 턱에 차도록 일하고,
또는 왕을 지키기 위해 적군에게 장렬히 죽임을 당하는
이미지를 떠 올린다.
이것은 철저하게 유교적 충성의 의미다.
한국교회는 유불선의 전통 종교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헬라어는 고사하고 영어 성경만 보더라도
이 말씀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믿음을 지키라"는 뜻이다.
죽을 때까지 숨을 헐떡이며 무언가를 해내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봉사 하라고 강요한다.
일례로 1, 2부로 예배를 하는 어떤 교회의 목사는
2부 예배에 드럼을 연주하는 집사에게 1부 예배에도
드럼을 연주하도록 강요했다.
이 집사는 물리치료사였다.
물리 치료사의 일은 거의 막노동에 비견된다.
1주일 내내 그런 노동을 하다가 주일에 봉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피곤하다고 했더니
목사는 "왜 죽도록 충성하지 않느냐"고 윽박질렀다.
정말 속에서 열불이 나고 가슴에서 피눈물이 난다.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을 그렇게 학대하고 압제해도 되는 것인가?
그건 목사가 아니라 사탄의 종이 하는 일이다.
목사의 일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성도를 온전케 하면, 마치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자란 성인이
자신의 일과 책임을 감당하듯이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자신을 드릴 것이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단순히 드럼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드럼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차적인 것이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머리이신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해서,
그 분이 세상에 대해 행하실 일들을 감당하는 것이다.
내가 '화석화 된 교회'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율법을 계승했다고 주장했지만
시내산 율법과는 전혀 관계없는,
오히려 모세 율법을 대적하는 부류였다.
오늘날 교회가 초대 교회를 계승하는가?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신가?
모세의 율법이 가리키는 분은 예수님이었다.
그런데 모세 율법의 계승자라고 참칭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오늘날 교회에 예수님이 오시면 교회가 그 분을 어떻게 대우할까?
그런 식으로 다시 오실 리 없겠지만
혹시 초림의 모습으로 교회에 다시 나타나신다면
예수님은 교회의 목사 장로들에 의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다.
이것이 끔찍한 예레미야 시대의 모습이다.
거룩만을 추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거룩만을 가르치지 않는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교인들을 '사역자'로 만들겠다고
덤비는 목사는 목사가 아니고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나는 거룩만을 가르치는 목사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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