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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일기] '난 언제나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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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3-18 | 조회조회수 :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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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병원 내에서 소위 '환자 폭력 (Patient Violence)'은 의료진들에게 매우 심각하고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여성 간호사의 약 90%가 환자로부터 거친 언사, 진료 거부, 욕설, 저주는 물론 신체적 상해까지 경험했다고 보고될 정도입니다.


이런 폭력적인 환자를 대할 때, 정도가 경미하면 간호사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주의하며 응대하기도 하지만, 증상이 심해지면 남자 간호사로 교체하거나 심한 경우 총기를 소지한 보안요원(Security)을 동반하고 진료에 임하기도 합니다.


제가 속한 '미국 전문 원목 협회(APC: Association of Professional Chaplains)'에서도 환자 폭력에 대응하는 채플린의 역할을 강조하며 다양한 연구와 사례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병원 역시 보안요원이 출동해야 할 만큼 환자가 폭력적일 경우, 대기 중인 온콜(On-call) 채플린의 페이지가 함께 울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이런 '성난' 환자들 전문인가 봅니다. 총을 찬 보안요원들이 둘러싸도 화를 주체하지 못하던 환자들이, 제가 방에 들어가면 신기하게도 화를 누그러뜨리고 대화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어서, 결국 건장한 보안요원들이 들어와 신체를 제어하고 간호사가 진정제를 투여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많은 경우 저의 '채플린 약빨(!)'이 제법 통하는 모양인지, 이제는 허리에 총을 찬 보안요원들도 저를 보면 깍듯이 인사하며 환자에게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간호사들도 문제 환자가 있을 때면 저에게 달려와 "얘기를 좀 나눠주시든, 기도를 해주시든, 어떻게 좀 해주세요"라고 간청하곤 합니다. 잔뜩 흥분했던 환자가 저와 10~15분 정도 시간을 보낸 뒤 평온해져서 나오면, 간호사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비결이 뭐냐고 묻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간호사들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농담조로 대답합니다.


"내 비밀은 말이야... 난 늘 화가 나 있거든(That's my secret, I'm always angry)."


영화 <어벤져스> 속 헐크의 대사를 빌린 농담이지만, 사실 여기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성난 환자를 만나 그의 사연을 들어주고, 진심으로 공감하며 함께 분노하고 토닥이는 과정, 그리고 함께 해결책을 고민하며 목청 높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시간.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대부분의 환자는 사이다를 마신 듯 시원해하며 미소를 되찾습니다.


언젠가 중환자실(ICU)의 30대 중반 백인 환자가 간호사들 사이에서 '경계 대상 1호'였던 모양입니다. 담당 간호사의 말은 듣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욕설을 섞어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통에 보안요원을 부를까 고민하던 중이었죠. 마침 병실 회진 중이던 저에게 영적 돌봄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이런 케이스에 제법 자신감(Competence)이 생긴 터라, 환자가 통화를 마치는 것을 확인하고 밝고 긍정적인 톤으로 인사를 건네며 들어갔습니다.


환자는 원목인 저의 밝은 태도에 오히려 정색하던 얼굴을 풀고 저를 환영해주었습니다. 가벼운 주제로 말문을 트고 중환자실에 오게 된 경위를 확인해보니, 다행히 치료가 잘 진행되어 곧 일반 병실로 전실될 긍정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습니다. "치료 결과도 좋은데, 안색을 보니 기쁨보다는 근심과 불편함이 더 커 보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그러자 환자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가정사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병원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아내가 면회는커녕 이혼 서류를 작성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겠다고 통보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더 가슴 아픈 사실은, 그 아내가 불과 몇 달 전 뇌암 수술을 받은 뒤 정신적 이상 증세를 겪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환자는 아내를 설득해보려 전화로 화도 내보고 위협도 해봤지만 상황이 나빠지기만 한다며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가슴 아파하고 절망의 탄식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레 기도를 제안했습니다. 그는 현재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어릴 적 교회에서 자랐다며 기꺼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저는 로마서 8장을 함께 읽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며,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실 것임을 나누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그를 축복하며 나오는데, 환자의 얼굴에 짧게나마 소망의 빛이 스치고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화가 잔뜩 난 환자에게 총을 슬쩍 보여주며 "가만히 있어!"라고 위협하는 것보다, 그가 왜 이토록 화가 나 있는지 사연을 들어주고 마음을 알아주는 공감이 총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의사도, 간호사도, 그리고 총을 찬 보안요원들도 결정적인 순간에 채플린을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공감의 힘'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격분한 환자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저만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난 언제나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게 제 비밀이죠."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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