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엄흥도, 안티고네와 아리마대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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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저녁, 한인타운의 한 극장에서 인기 중에 상영되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누적 관객 수 1,300만에 접근하는 영화로 감성적인 폭격을 맞았습니다. 함께 본 아내와 딸도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저도 몰래 눈물을 닦았습니다.
목회하며 수도 없이 많은 장례를 치렀습니다. 45세에 담임목사가 되어 10여 년 동안 정중한 예식으로서의 장례식을 집례하였으나, 50대 중반을 넘기면서는 장례식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감정이 이입되며 집례하게 되니, 이것이 ‘목회자로서의 철이 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문화권과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불문하고, 돌아가신 분을 근실하게 모시는 일은 매우 중요한 윤리적 의무인 것 같습니다.
영화 ‘왕사남’에서도 영월 호장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3족을 멸하겠다”는 왕명을 거역하며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모십니다. 그는 왕명을 거스르며 단종에 대한 의리와 충정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세조에 의해 폐위된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으나, 엄흥도는 집안의 파멸을 무릅쓰고 왕에 대한 충성과 신하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엄흥도의 행동은 극한 현실 속에서 왕명을 거스르면서까지 사람이 지킬 가치가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훗날 숙종에 의하여 공조판서로 추증되고, 영조에 의하여 충의공으로 불려지게 됩니다.
고대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속에도 유사한 갈등, 실정법과 자연법의 갈등, 왕의 법과 신법의 격돌이 나타납니다. 비극적인 왕 오이디프스가 방랑의 길을 떠난 후, 그의 두 아들은 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서로 싸우다가 죽게 됩니다. 외삼촌 크레온이 대신 왕이 된 후, ‘군사를 일으켜 테베를 공격했던 죽은 왕자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오이디프스 왕의 딸인 안티고네는 반역자로 규정된 자기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흙으로 덮어 장례를 치릅니다.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을 묻는 것이 신법에 부합하는 의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녀는 왕명을 어긴 죄로 갇혔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안티고네의 행동은 가족 사랑과 신법에 대한 충실함이 권력의 요청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윤리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 숨겨진 예수의 제자이자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담대하게 예수의 시신을 빌라도 총독에게 요청합니다. 요셉은 빌라도 총독의 허락으로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자기의 새 무덤에 안치합니다. 숨겨진 다른 제자 니고데모는 많은 향품을 가져와 유대인의 장례 관습에 따라 시신을 세마포로 싸는 일을 돕습니다. 당시 예수는 “유대인의 왕” 즉 로마에 대한 반역자로 처형된 인물이었기에, 그를 공개적으로 장례하는 것은 사회적·종교적 위험을 동반하는 행동이었고, 당시 정치ㆍ종교적 권위를 가진 공회원의 신분을 훼손시킬 수도 있는 위험 행위였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에 대한 신앙 때문에, 명예 훼손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시신을 정중히 모십니다.
이 세 사례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니지만 중요한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첫째, 권력자의 명령이나 실정법을 상대화시키는 더 높은 윤리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인식입니다. 안티고네에게는 신의 법이, 엄흥도에게는 충성과 의리가, 요셉과 니고데모에게는 신앙의 담대함이 그러한 가치였습니다. 둘째로 이들은 모두 망자의 시신을 존중하는 장례가 인간의 다른 가치를 뛰어넘는 보다 더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도리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조선의 엄흥도와 그리스의 안티고네, 그리고 이스라엘의 요셉과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도 권력을 한계 짓는 양심, 신법과 신앙이라는 도리가 있음을 웅변적으로 알려줍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목사, KCMUSA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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