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달걀 꾸러미’ 같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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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 수술 이후 3개월마다 병원에 가서 정기 검진을 받는다. 오늘이 그날이다. 서울 가는 고속도로가 뚫렸지만 맹맹하기 그지없는 길이라 대부분은 국도를 탄다. 춘천 가까이, 가평 어디 쯤 이었을 것이다. 오줌이 마려워 차를 세웠다. 오가는 자동차에서 내가 뭘 하는지 모를 만큼의 거리로 가자니 추수가 끝난 빈 겨울 들판의 복판이었다. 논바닥엔 탈곡을 끝낸 볏짚이 까칠한 해탈의 얼굴로 흩어져 있었다.
볼일 끝내고 볏짚 한 단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가평 시내에 들려 열 개짜리 달걀 한 판도 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볏짚에 물을 뿌려 눅눅하게 만들어서 가지런하게 추렸다. 그리고 그 볏짚으로 새끼를 꼬고, 물을 먹고 눅눅해진 나머지 짚으로는 달걀 꾸러미를 만들었다. 옛날,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때 5일 장엘 가야 하는 어머니를 위해 만들던 달걀 꾸러미였다.
사실 달걀 꾸러미는 ‘꾸러미’라는 포장의 개념보다는 달걀이 들어있던 ‘둥지’의 구실과 비슷하다. 습기를 막아주고 충격을 완화하는 기능도 있지만, 달걀 꾸러미는 가장 포근하고 안전한 달걀의 집이며 제2의 둥지다. 내가 달걀 꾸러미를 포장의 개념이 아니라는 뜻은 달걀 꾸러미가 반 개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포장을 할라치면 꾸러미의 절반만 짚으로 두르지 말고 모두 휘감듯(요즘 종이나 플라스틱의 달걀판같이) 짚을 덮어 달걀을 싸야 옳다. 그러나 우리네 옛날 달걀 꾸러미는 반만 싸고 반은 그대로 두어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회화적 의미가 있다.
왜 반만 쌌을까? 기능만을 생각했다면 일 다 싸는 게 안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포장 기능은 충족되었을지 몰라도 달걀의 형태와 구조가 가려져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달걀의 정보성과 언어성도 사라지게 된다. 달걀 꾸러미를 반 개방성으로 하지 않고 완전히 뒤집어 싼다고 생각해 보라. 생각만으로도 답답하지 않은가.
달걀 꾸러미를 반만 싸는 것은 물리적인 기능만이 아니고 정보성을 중시해서일 것이다. 반만 싼 꾸러미는 그것을 들고 다니는 사람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또 그것이 상품으로 전환이 될 때 그 신선도나 크기의 정보를 한눈에 전달할 수 있다. 정보만이 아니라 시각적인 디자인의 미학이 달걀 꾸러미에 담겨 있다. 또 원형의 달걀과 직선의 짚이 이루어내는 기하학, 유기질과 무기질의 촉감에 있어서나 추상조각과 같은 완벽한 대조와 조화의 아름다움은 또 어떤가.
옛날 ‘달걀 꾸러미’는 기술적 합리주의가 낳은 단순과 구속의 해방을 시도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과도 같다. 왜냐하면, 반만 포장된 달걀 꾸러미야말로 기능주의의 합리성을 커무니케이션의 합리성으로 대치하는 탈산업화 시대의 정신과 통하기 때문이다. 형태와 구조를 노출 시키는 아름다움, 깨지지 않게 내용물을 보호하는 합리적인 기능, 포장의 내용을 남에게 알려주는 정보의 공개성을 동시적으로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차별화’는 새로운 사고의 틀이다. 그리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응용이다. 그러므로 ‘달걀 꾸러미’는 기술적 합리주의의 해방을 시도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일 뿐만 아니라, 존재 내적인 삶의 풍요를 공급하는 ‘차별화’된 의식의 표징이다.
당회를 하기 위해 교인명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띄엄띄엄 예배당 출입을 하는 까닭에 정리하지 못했던 교우들이 수십 명이다. 그동안 교인명부에서 뺀다는 게 뭐해서 간당간당 붙여놨었는데 이젠 결단을 내려야겠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복 받는 조건처럼 되어 있었던 헌금도 손에 잡힐 만큼 확 줄었다. 치료제나 백신이 나온대서 과거로 돌아갈 양상도 아니다.
이제 예배당도 ‘형태와 구조를 노출 시키는 아름다움, 깨지지 않게 내용물을 보호하는 합리적인 기능, 포장의 내용을 남에게 알려주는 정보 공개’의 은유를 지닌 달걀 꾸러미처럼 변해야 한다. 진정으로 교인들의 내적 삶의 풍요를 공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물화(物化)와 수사(數詞)로 포장한 종이나 프라스틱 계란판이어서는 안 된다.
허태수 목사(성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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