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10. 바다를 견딘 노인과 죽음에 이르는 병: 헤밍웨이를 위한 신앙적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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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다를 정복할 수 있을까요?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바다를 이긴 듯 보입니다. 그는 고독한 항해를 견디고, 거대한 청새치와 싸우며, 상어들에게 성취의 대부분을 빼앗긴 뒤에도 항구로 돌아옵니다. 남은 것은 뼈뿐이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바다는 그의 몸을 지치게 했으나, 그의 존엄을 완전히 삼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작품 밖의 헤밍웨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더 어두운 바다 앞에 섭니다. 바다를 견딘 노인을 쓴 작가가, 끝내 자기 내면의 깊은 어둠 앞에서 무너졌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먹먹한 가슴으로, 쉽게 말을 잇지 못합니다.
헤밍웨이는 1961년 7월 2일 미국 아이다호주 케첨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심각한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겪었고, 우울증으로 메이요 클리닉에서 전기충격 치료를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문학적 장면도 아니고, 호기심의 대상도 아니며, 단순한 도덕적 판결의 사례도 아닙니다. 한 인간의 내면이 무너지는 순간 앞에서 우리의 언어는 작아져야 합니다. 비극 앞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판단이 아니라 침묵이고, 호기심이 아니라 애도이며, 단정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절망을 인간 실존의 깊은 병으로 읽었습니다. 다만 정확히 말하면, 키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오늘날의 임상적 우울증 그 자체와 동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절망, 곧 영혼의 병을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통찰은 인간의 어둠을 신앙적으로 사유하게 합니다. 절망은 때로 마음의 병과 뒤엉켜 인간을 삶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리로 몰아갑니다. 절망을 단순히 의지의 부족으로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을 너무 얕게 보는 일입니다.
우울증은 병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분 저하가 아니며, 믿음이 부족해서 생기는 수치스러운 문제가 아닙니다.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도 깊은 우울과 육체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놀라운 설교자였지만, 동시에 무거운 침체를 지나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경우는 신앙과 정신적 고통이 반드시 서로 배척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믿음 있는 사람도 우울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도 치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상담과 의학적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울증은 실존입니다. 우울증을 단순히 “믿음이 약해서 생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목회적으로도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신앙은 우울증 치료를 대신하는 구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치료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는 은혜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치료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의학을 적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일하시며, 때로 의사와 상담자와 친구와 공동체의 손길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깊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혼자 견디지 말아야 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말해야 하고, 전문적 상담과 치료를 구해야 합니다. 생명을 해칠 생각이 있다면 즉시 가까운 사람, 목회자, 상담자, 의사, 응급기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를 만나 적절한 처방을 받아야 합니다.
헤밍웨이의 죽음은 그의 문학을 해석하는 하나의 어두운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 전체를 그 마지막 순간 하나로 환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전쟁과 상처, 모험과 고독, 남성성과 침묵, 인간의 품위와 허무를 집요하게 쓴 작가였습니다. 1954년 노벨문학상은 『노인과 바다』에서 드러난 그의 서사 예술과 현대 문체에 끼친 영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의 문학은 단지 죽음을 향한 문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품위를 지키며, 어떻게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지를 묻는 실존적인 문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살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선물이며, 인간은 자기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절대적 주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 신앙은 절망한 사람을 단순히 정죄의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의 사람들도 무너졌습니다. 엘리야는 광야에서 죽기를 구했고, 욥은 자기 생일을 저주했으며, 시편의 기도자들은 깊은 탄식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먼저 차가운 판결문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지친 엘리야에게는 먹을 것과 쉼을 주셨고, 상한 마음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로마서 8장 38-39절은 죽음도, 생명도,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증언합니다. 이 말씀을 비극 앞에서 쉽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장식품이 되어서는 안 되고, 고통을 덮는 얇은 천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조심스럽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은 죽음의 방식 하나로 폐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지막 순간만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 상처, 두려움, 갈망, 무너짐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가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둠보다 깊습니다.
시편 34편 18절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배워야 할 언어입니다. 판단보다 가까이함, 설명보다 애도, 정죄보다 긍휼입니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왜 그렇게 약하냐”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은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괜찮아야 한다”는 압박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도움을 찾겠다”는 동행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고통 자체만이 아니라, 그 고통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고립입니다.
우리에게 더 깊은 회개와 배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때로 강한 믿음의 언어로 약한 사람을 침묵시켰습니다. “기도하면 된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이 상담과 치료와 공동체적 돌봄을 가로막을 때, 그것은 복음의 언어가 아니라 고립의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돌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병원과 상담실의 문도 두드려야 합니다. 공동체는 신앙의 이름으로 고통을 축소하는 곳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이 안전하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은혜의 공간이어야 합니다.
산티아고는 바다에서 돌아와 잠듭니다. 그의 곁에는 마놀린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모든 고통을 다 설명하지 못해도 곁에 머무는 공동체, 실패의 뼈만 남은 자리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알아보는 공동체, 마지막 침묵 앞에서 판결보다 기도를 선택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모든 질문에 즉시 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누군가의 곁에 머물 수 있습니다. 울고 있는 사람의 옆에 앉을 수 있습니다. 어둠 속으로 혼자 걸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놀린의 영성입니다.
헤밍웨이를 위한 신앙적 묵상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죽음을 미화하지 않는 것. 그의 삶을 마지막 비극 하나로 폐기하지 않는 것. 그의 절망을 낭만화하지 않는 것. 그러나 그 절망 앞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 그리고 오늘 우리 곁의 누군가가 같은 어둠 속으로 홀로 걸어가지 않도록, 조용히 마놀린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문학은 우리에게 상처 입은 인간을 보게 하고, 신앙은 그 인간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헤밍웨이가 쓴 노인은 거친 바다를 견뎠습니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또 다른 바다에서 무너졌습니다. 저도 바다에서 친구를 잃은적이 있습니다. 이 모순은 우리를 쉽게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다만 신앙은 마지막에 이렇게 기도하게 합니다. 주님, 인간의 바다는 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때로 자기 자신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어둡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긍휼은 그보다 더 깊습니다. 상한 마음 곁에 가까이 계시는 주님, 절망의 밤을 지나는 이들에게 오늘 필요한 일용할 양식과 쉼과 사람과 은혜를 내려 주소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누군가의 곁에 머무는 마놀린이 되게 하소서. <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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