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합리성 저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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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저는 고모할머니에게 처음으로 임사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염병으로 죽은 머슴을 마을 사람들이 멍석에 둘둘 말아 장지로 옮기던 중, 산마루에서 잠시 쉬는 사이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살아 돌아온 그는 자신이 경험한 일을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저는 수많은 임사체험의 사례를 읽고 들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 제10권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시체 더미에서 되살아난 군인 에르(Er)의 이야기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임사체험의 진위를 둘러싸고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논의가 이어져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죽음 직전 뇌의 생리적 반응이나 환각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 체험한 실제적인 영적 경험으로 이해합니다. 초자연적 체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을 단순한 욕망의 투사나 강박증, 환영, 억압된 무의식의 재생, 혹은 신경증적 현상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감각을 넘어서는 영적 차원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환상과 계시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증언합니다(고후 12:1–12).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체험을 자랑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경험은 일반적인 의미의 임사체험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상과 계시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인간이 일상적 감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초월적 세계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성경적 증언입니다.
성경은 참된 선지자의 권위를 설명할 때 종종 하나님께서 주재하시는 “천상 회의”(heavenly council)를 언급합니다. 하나님과 천군ㆍ천사가 모이는 이 회의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뜻을 듣고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참된 선지자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러한 계시는 경험적 관찰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전달되는 초월적 지식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인식에는 경험과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함을 성경은 전제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 속에서 살아갑니다. 역사는 합리성과 과학적 설명의 영역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계몽주의가 강조했던 “진보(progress)”의 개념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식은 축적되고 기술은 발전하며 인류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인간이라는 현상과 역사에는 합리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차원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는 역사의 흐름 속에 서로 다른 차원이 공존한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역사철학을 종합해 보면, 첫째는 합리성과 진보의 차원이며, 둘째는 모호성과 죄책, 실존적 갈등이 지배하는 윤리적 차원이고, 셋째는 계시와 희망이 열리는 초합리적 신비의 차원입니다. 역사는 단순히 합리성만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동시에 이성과 죄책, 그리고 희망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최초의 역사철학자로 불리는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는 이러한 역사를 “역사의 위대한 교향악”(the great symphony of history)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수많은 악기가 서로 다른 소리를 내면서도 하나의 교향곡을 이루듯이, 역사 역시 여러 차원이 함께 어우러져 흘러갑니다. 인간의 과학과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지만, 인간성은 크게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정의와 사랑, 선과 의무에 대한 문제는 고대나 현대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21세기의 인간성 파괴와 도덕적 혼란 속에서 십계명과 산상수훈의 윤리는 더욱 절실한 요청이 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역사 속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the divine mystery of history)가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과 구원, 그리고 재림의 소망은 인간의 추론만으로 획득되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시종교의 잔재도 아니며, 억압된 무의식이나 죄책감의 심리적 산물도 아닙니다. 이러한 진리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초합리적 지식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적어도 세 가지 차원을 포함합니다. 첫째는 경험과 관찰을 통해 얻는 합리적 지식입니다. 둘째는 죄와 고통, 비참함을 자각하는 실존적·윤리적 지식입니다. 셋째는 계시를 통하여 주어지는 신비적 지식입니다. 창조와 타락, 속죄와 부활, 그리고 재림과 종말에 관한 신앙의 진리는 이 마지막 차원에 속합니다. 그것은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을 초월하는 진리입니다.
이러한 지식의 다차원성을 인정하는 태도는 지적 독단을 경계하게 합니다. 리쾨르는 창조와 타락, 예언의 역사, 더욱이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과 빈 무덤, 그리고 재림의 이야기가 고대 그리스의 합리주의 전통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의 신비를 단순한 신화나 신경증으로 환원해서도 안 됩니다. 반대로 모든 신비를 무비판적으로 신화화하는 태도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이성과 신앙, 과학과 계시를 서로 적대시키기보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균형감각이 필요합니다. 합리적 진보의 세계와 초합리적 소망의 세계, 그리고 인간의 모호한 실존적 세계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열린 태도가 요구됩니다. 이러한 개방성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풍성하며,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이성을 넘어 더욱 넓은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음을 겸손하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 KCMUSA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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