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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6. 상실감: 상어는 청새치의 살을 빼앗았으나, 노인을 빼앗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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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7-01 | 조회조회수 : 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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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와 상실은 때로 한 배 안에서 만납니다. 산티아고가 마침내 거대한 청새치를 붙잡았을 때, 바다는 잠시 그의 편인 듯 보입니다. 긴 고독과 통증, 인내와 사투 끝에 그는 거대한 생명을 배 곁에 묶습니다. 그것은 한 노인의 승리이며, 오래 침묵하던 바다가 건넨 응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노인과 바다』의 비극은 바로 그 다음에 시작됩니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몰려오고, 산티아고가 목숨 걸고 잡은 청새치는 조금씩 뜯겨 나갑니다. 인간이 어렵게 이룬 것이 무자비하게 훼손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조용하지만 잔혹합니다.


상어는 이 작품에서 단순한 바다 생물만은 아닙니다. 물론 헤밍웨이는 상어를 신학적 악마로 그리지 않습니다. 상어도 바다의 일부입니다. 그것들도 자기 본능을 따라 움직이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이야기 안에서 상어들은 인간의 성취를 갉아먹는 힘으로 다가옵니다. 시간처럼, 부조리처럼, 죽음처럼, 허무처럼 다가옵니다. 산티아고가 피와 손의 상처로 얻은 청새치는 상어들의 이빨 앞에서 살이 찢겨 나갑니다. 아름다웠던 것이 훼손되고, 노동의 결실이 사라지며, 승리의 증거가 앙상한 뼈로 남습니다.


이 장면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도 상어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 쌓아 온 명예를 한순간에 흔드는 사건이 있습니다. 정직한 노동의 결실을 빼앗는 불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갉아먹는 오해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서서히 약하게 만드는 시간이 있습니다. 사역과 연구와 가정의 열매를 조금씩 갉아먹는 피로와 갈등과 상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청새치를 잡은 뒤에 상어 떼를 만납니다. 성취의 기쁨은 잠시이고, 허무가 곧장 뒤따라옵니다.


산티아고는 싸웁니다. 그는 상어들을 향해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합니다. 작살을 잃고, 칼을 묶어 싸우고, 노를 휘두르며, 끝까지 저항합니다. 그러나 그는 상어들을 완전히 막아 내지 못합니다. 가진 도구는 부러지고, 몸은 지치며, 청새치는 점점 사라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청새치를 온전히 지켜 냈느냐가 아닙니다. 그는 결국 청새치의 살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지는 않습니다. 상어는 산티아고의 청새치를 빼앗아 갔지만, 산티아고의 영혼까지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헤밍웨이가 보여 주는 비극적 품위입니다. 삶은 인간에게 정당한 보상을 늘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용기와 성실이 언제나 온전한 결과로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잡았지만, 그것을 집으로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싸워야 할 때 싸웠고, 견뎌야 할 때 견뎠으며, 잃어버리는 순간에도 자기 품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헤밍웨이의 세계에서 인간은 패배를 피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패배가 인간의 전부를 정의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장면 앞에서 악과 허무의 문제를 묻습니다. 왜 선한 수고는 훼손됩니까? 왜 정직한 사람이 언제나 온전한 보상을 받지는 못합니까? 왜 아름다운 것은 쉽게 상처 입고, 인간의 성취는 시간 앞에서 무너집니까? 성경도 이 질문을 피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은 피조 세계가 탄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세계는 아직 완성된 세계가 아닙니다. 죄와 죽음, 부패와 허무의 힘이 여전히 인간의 삶을 찢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바다에는 실제로 상어가 있습니다.


성경은 허무가 마지막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은 주 안에서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증언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일이 세상에서 즉시 보상받는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은 약속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신실하게 드려진 삶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사라져도 무의미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청새치의 살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견딘 충성, 사랑으로 붙든 소명, 포기하지 않은 신실함은 허무의 이빨보다 깊은 곳에 남습니다.


우리와 기독교 리더들도 이 상어의 시간을 압니다. 오래 섬긴 공동체가 갈등으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사역했으나 오해가 남을 때가 있습니다. 연구와 교육의 열매가 제도와 경쟁 속에서 가려질 때가 있습니다. 선교의 수고가 숫자로 설명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부모의 눈물 어린 헌신이 자녀에게 곧장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묻습니다. “내가 붙든 청새치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내 인생의 수고는 헛된 것이었는가?”


시편의 기도자들은 탄식했고, 욥은 항변했으며, 바울은 약함 속에서 족한  은혜를 배웠습니다. 믿음은 상어가 없다고 말하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믿음은 상어가 물어뜯은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아직 인간의 존엄과 소명을 붙들고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부활 신앙은 바로 그곳에서 빛납니다. 죽음이 실제이듯, 하나님의 생명도 실제입니다. 허무가 깊듯, 은혜는 더 깊습니다. 잃어버림이 크듯, 하나님 안에서 다시 붙들리는 생명은 더 큽니다.


산티아고가 항구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거대한 뼈를 봅니다. 어떤 이는 큰 실패를 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놀라운 크기를 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저 이상한 구경거리로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독자는 그 뼈 곁에서 노인의 보이지 않는 바다의 사투를 봅니다. 결과는 처참하지만, 그 사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청새치의 살은 없어졌지만, 노인의 품위는 남았습니다. 상어들은 물고기를 뜯어 갔지만, 그의 인내와 용기와 경외까지 삼키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 뼈만 남은 청새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한때 분명히 살아 있었고, 아름다웠고, 의미 있었던 것이 이제는 앙상한 흔적처럼 남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의미는 남은 살의 양으로만 계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끝까지 사랑했는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무엇을 잃고도 끝내 자기 영혼을 팔지 않았는지를 보십니다. 상어의 이빨이 날카로워도, 하나님의 기억은 더 깊습니다. 그 기억 안에서 뼈만 남은 실패도 은혜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도 세상의 눈에는 실패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흩어졌고, 군중은 조롱했으며, 주님의 몸은 찢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실패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부활은 상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부활은 상실과 죽음이 마지막 단어가 아님을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상실 앞에서 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이 최종 판결을 내리도록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영혼을 잃지 않았습니다. 상어들은 그의 수고의 열매를 뜯어 갔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노인과 바다』가 보여 주는 상실의 깊은 역설입니다. 인간은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끝까지 지켜야 할 중심이 있습니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엄이며, 부르심 앞에서의 신실함이며, 은혜 안에서 끝내 붙들리는 영혼입니다.


우리에게도 상어의 시간이 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우리의 전부를 규정하지는 못합니다. 상어는 청새치의 살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세월은 성취의 모양을 바꾸고, 허무는 우리의 수고를 갉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드려진 삶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빈 배도 보시고, 찢어진 손도 보시며, 뼈만 남은 청새치 곁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도 보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상실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빼앗긴 것은 많지만, 하나님께서 아직도 나를 붙드신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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