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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가장한 사탄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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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1-02-02 | 조회조회수 : 4,2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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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이 지역에서 목회하던 목회자에게 “사람들이 복음을 모릅니다”라고 했더니 그 목사는 한심하다는 듯 “요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라고 대꾸했다. 나름 생각이 있는 목사라고 생각하고 슬쩍 떠본 것이기 때문에 내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 아픔이 있다.

복음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이다. 그리고 그 목사의 말대로 이 문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목사가 말하는 예수가 누구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예수를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진리다. 그러나 그 문장의 ‘예수’와 ‘구원’이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 그리고 ‘구원’이냐에 대해 나는 대단히 부정적이다. 오늘날 말해지는 ‘예수’는 성경의 예수가 아니다. 오늘날 말해지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사실 이것은 초대 교회를 지나자마자 작동한 사탄의 궤휼이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화 한 후 그 기독교에서 선포되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고 구원은 구원이 아니었다.

이것을 이상히 생각지 말라. 출애굽의 모든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눈앞에서 보았다. 그런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여호와라고 부르며 여호와의 절일을 선포한다(출 32:4-6 참조). C. S. 루이스는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에서 이것을 ‘합성물’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이 자기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신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 임금(요 14:30)은 사탄이며 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다. 또한 이 세상 천하만국의 영광을 잠시 넘겨 받은 자(눅 4:6)다. 이 세상 풍속은 잠시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 그런데 사탄의 본질은 ‘거짓의 아비’(요 8:44)이다. 그래서 그는 바른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복음을 왜곡한다. 진리가 선포될 때마다 거짓을 혼합한다.

복음과 진리는 항상 혼합되고 비틀리고 왜곡된다. 모세 직후 시내산 율법은 화석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가 유대교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포도주’를 주셨지만 그것도 콘스탄틴으로 막을 내렸다. 종교 개혁으로 회복된 기독교의 생명력은 한 세대를 채 유지하지 못했다.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도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정말 좋은 것에는 반드시 사탄의 방해가 있다. 거룩한 것이 타락하면 끝이 없다. 사탄은 가장 탁월한 피조물이었다. 그가 타락했다. 그는 자신이 타락한 그 깊이를 세상에 그대로 들고 들어왔다. 그가 지배하는 이 세상 풍속은 반드시 그 정도의 타락을 겪는다. 그래서 존 번연은 세상을 ‘장망성’이라고 표현했다. 장차 망할 성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 장망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오셨다. 그 탈출이 ‘구원’이다.

그런데 오늘날 선포되는 예수는 이 세상의 번영과 이 세상의 긍정적 변화를 위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구원은 번영과 긍정적 변화다. 그것은 예수가 아니고 우상이다. 우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내재’ 뿐이다. 우상에게는 절대 초월이 없다. 그것은 구원일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세상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그것을 시사한다. 죽으면 현재의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하자” 같은 공산당식 선동에 속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의 주류 사회에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선동에 속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장밋빛 환상에 속으며 살아왔다. 이것은 기독교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다. 그런데 “요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라고 주절거린다.

세상에서 우리는 나그네와 행인이다(벧전 2:11). 어떤 나그네가 본향을 가며 지나는 길에 꽃을 심고 도로를 평탄케 하려고 시간을 보내겠는가? 나그네의 모든 목적은 속히 본향에 돌아가서 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선포하는 자들은 마치 이 길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집을 짓고 정원을 만들도록 ‘선동’한다. 이것은 사탄의 메시지다. 하늘의 ‘초월’을 세상의 ‘내재’로 치환하는 것이 곧 사탄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맛보고 밤새 자신을 찾아 온 사람들에게 ‘하늘의 떡’을 선포함으로 다 쫓아버리셨다. 예수님은 ‘하늘의 떡’을 주려고 오신 분이지 ‘육신의 떡’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는 육신의 떡을 주기 위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온 것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육신의 떡은 구원이 된다. 거기에 이사야서 53장 5절에서 예수는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는 구원자로 치환된다. 정확하게 사탄의 메시지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믿은 노예들이 이 세상의 ‘신분해방’을 구원으로 여겼는가? 예수 믿은 귀족들이 더 높은 자리와 육신의 건강을 구원으로 여겼는가? 장망성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한 성’만을 소망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기름 가마에 튀겨졌고 사자 먹이가 되었으며 원형 경기장의 횃불이 되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들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들은 이 세상을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요 행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고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을 불러들이고 미국의 주류 사회에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주절거림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복음인가? 이것이 기독교인가? 이것은 ‘사탄교’일 뿐이다.

이쯤하면, 자신은 위의 진술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반론들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바울의 유대교에서도 에스겔서 8장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자들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정죄하셨던 ‘외식’하는 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정말 신실했다. ‘율법의 의’로는 전혀 흠이 없는 자였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그 역시 복음을 모르는 것은 똑 같았다. 다메섹의 그 만남이 없었다면 그 역시 복음을 모르는 가운데 죽을 운명이었다. 내가 「기독교인가 유사유대교인가」에서 진술했듯이 기독교는 윤리적, 도덕적 종교가 아니다. 또한 우상이나 미신을 배제하는 이성적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그냥 기독교다. 다른 설명이나 이유가 필요 없다.

어떤 종교든지 그 안에는 그 교리를 신실하게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반면 그 종교를 이용해 세상 것을 누리려고 하는 부류들이 있다. 전자가 주도권을 잡으면 건전한 종교가 되고 후자가 주도권을 잡으면 타락한 종교가 된다. 그것이 종교의 세상적 기준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다. 성경의 예수가 있으면 참된 기독교이고 성경의 예수가 없으면 거짓 기독교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캐논)의 기준을 순전히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른데 어떻게 참된 기독교, 사탄의 기독교를 구별하겠는가?

오늘날 정인이 사건, 마이클 조 사건 등으로 기독교가 매도를 당한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나름대로 유명하다 하는 자들이 비판을 하고 사과를 하는데 그들도 기독교적 시각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위에서 진술한 참된 예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세상의 인정’을 원치 않는다.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면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미움과 핍박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진리다. 그런데 사탄은 세상에서 인정을 받으라고 부추긴다. 핍박을 피하고 오히려 존경과 사랑을 받으라고 한다. 그 끔찍한 메신저들을 통해, 사탄에게 영혼을 판, 그래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수여받은 것들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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