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국 목사의 음악목회 이야기] 양쪽 모두를 보세요!(Look Both Way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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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우리는 또한 위와 아래를 모두 보아야 합니다.
비행사의 비유를 사용하자면, 우리는 또한 위와 아래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비행기가 갑자기 고도를 잃으면, 밑에 무엇이 부딪칠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만일 고도를 높이려면, 비행기는 먼저 모든 상황이 안전한지 확인해야 합니다.
찬양과 예배 인도자가 위를 볼 때 그는 항상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역은 현재와 영원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금, 당장의 즉각적 만족”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존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기를 권면합니다(히 12:2).
우리가 위를 볼 때 우리는 그분의 완전하심과 거룩하심, 그리고 경이로우심을 대하게 되며 “그와 같음으로 자라도록 (롬 8:29)” 동기를 주고, 영감을 주는 전능의 속성으로 가득 찬 그분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탁월하신 속성은 그분의 경이로운 전능하심 앞에 우리가 몸을 굽혀 경배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분을 떨리는(욥 9:34), 두려운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함 (시 111:10)이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의 핵심이며 진정한 찬양과 경배의 핵심이 됩니다. 이것이 소위 “예배 장사꾼”들이 말하려 하지 않는 예배의 부분인데, 이것이야말로 찬양과 예배의 진위 여부의 핵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찬양과 경배의 인도자는 기본적 선제조건으로써 성경적인 명확한 신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넷째로 물론 우리는 아래를 보아야 합니다.
밑을 내려다보면 인간의 절박한 필요를 보게 됩니다. 지금 교회의 사역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거대한 아픔과 고통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 고통과 아픔이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법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에 순종하지 못함으로 인해 자초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류는 “내 방식대로”를 고집해 왔습니다. 즉, “내게 무엇이 가장 좋은가를 가장 잘 아는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다”라는 사상이 오늘날 유행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최선을 아는 존재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해 완전한 계획을 설계하신 분도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절대적 주권을 지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는 가장 지혜로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런데 그분의 구속계획의 첫째 되는 이유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요 4:24). 우리는 지금과 또한 영원히 예배할 자들을 두루 찾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열망을 알고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란 우리가 교회에 올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올 때 시작됩니다!
아래를 볼 때 우리는 인류를 보게 됩니다. 상실과 죄와 그리스도가 없는 아래를 향한 시각은 애절하고 처참한 혼돈의 모습입니다. 범죄, 증오, 불신, 폭력과 성적 타락은 모두 하나님과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그분의 우선적 요구를 거부하는 데에만 힘쓴 인간의 자업자득에서 온 결과들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로 향하는 길은 죄악의 인류가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고 그의 구속의 해결책을 받아들일 때 갈보리에서 시작됩니다. 찬양과 경배의 첫 시작은 우리 자신에게서 눈을 떼고 영원히 중요한 것들에 눈을 돌려 구원 속에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게 될 때입니다!
다섯 번째로, 우리는 좌우 양쪽을 모두 보아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왼쪽과 오른쪽을 모두 보아야 합니다. 왼쪽을 보는 것은 객관적 견해의 시각일 것이고, 오른쪽은 주관적 견해의 시각일 것입니다. 객관적 기준은 지속적 가치를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위대한 예술을 만들까?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되었는가? 사람들이 훌륭한 시와 음악을 주시하여 관찰해 보면, 그 작품의 위대함의 어떤 뚜렷한 자질이 드러납니다. 자질의 한 가지 증거는 지구력입니다. 즉 시간의 시험을 견뎌내는 능력입니다.
위대한 작곡가들과 시인들의 작품은 어떻게 잘 쓰여지고 작곡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아이작 왓츠의 찬송가 “예부터 도움 되시고”를 살펴보면 시 90편의 주요 개념을 여섯 개의 이중절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게 됩니다. 이 가사들은 그냥 저절로 맞아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에 걸쳐 한 절 한 절을 얻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거의 확실한 것은, 더 높은 청렴도의 예술은 파악하고 연주하기에 더 어렵고 도전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음악을 준비하는 데 헌신하고 노력한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 속에서 깊은 만족과 성취감과 풍성함을 맛볼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음악에 담긴, 조심스럽게 잘 짜여진 위대한 영적 가사는 인간의 삶 속으로 움직여 들어오는 하나의 훌륭한 설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경이로우시며 그의 속성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오직 인간의 최고의 창작만이 그에게 드리는 예배에 합당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옹호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 회중들은 그런 수준의 예술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찬양과 예배 인도자들로서 우리의 주된 목표는 공동체의 유산인 박물관을 유지하거나 공동체의 예술적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임무와 사명은 우리의 하나님의 진정한 예배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술을 통하여 하나님께 도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은 자신의 예술이 찬양과 예배에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를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객관성, 즉 좌측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것은 성실한 찬양과 경배 인도자의 책임입니다.
여섯 번째로, 우리는 주관적 대화의 관점인 오른쪽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의사소통의 보다 주관적인 면인 오른쪽도 보아야 합니다. 일반 대중과 연결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예배에 사용할 수 있도록 보완할 수 있을까요? 탁월함에 있어서는 클래식이 아니지만, 일반 대중의 실제와 현재를 말해주는 음악과 시를 쓰고 사용하는 것이 잘못되고 틀린 것일까요?
유튜브와 뮤직비디오, 슬럼가의 파티와 자동차 스테레오와 상가에서 들리는 음악이 좋아서 연주회에서 멀어져 버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이런 현실을 계속 무시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상관없는 변명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받아들이고도 부주의한 “의사소통 (communication)”으로 그것을 모독하게 만드는 것은 교회를 공동체와 헌신의 낮은 단계로 이끄는 문제의 일부입니다!
영원한 진리의 정확한 표현보다는 무엇이 팔리고 무엇이 재미있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될 때, 우리는 영원한 관련성에서 무감각한 마취제와 같은 시끄러운 소리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기에, 진정하고 영원한 의사소통의 세계에서 정확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기를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쪽 모두를 보아야 합니다!
찬양과 경배를 인도하는 우리들이 진실로 양쪽을 모두 바라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기도하며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여러 가지 영역의 문제와 사역에 대해서 오직 한쪽만을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때때로 그 한쪽의 길만이 일주일을 더 버티는 실용적인 추진력일 때가 있기에, 우리의 사역의 범위 내에서 그러한 예외의 경우도 받아들일 수 있는 안전지대를 개발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사람들이 “우리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는 사상에 더욱 전념하게 됨에 따라, 찬양과 경배의 인도자들의 사명은 훨씬 더 커지고 막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양쪽 모두를 바라볼 때 얻게 되는 통찰력을 간파하고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을 찾고, 다윗처럼 겸손히 무릎을 꿇어 거룩한 비전을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가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시 86:11,12)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필자 김영국 목사는 대광고와 한양대학을 졸업하고 1974년 미국으로 이주, Hope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신학과 음악목회를 공부하였고, 척 스윈돌 목사와 그의 음악목사이며 스승인 하워드 스티븐슨의 영향을 받았으며, 27년 동안 남가주 오렌지카운티의 큰빛한인교회에서 사역하였다. 지금은 저서와 번역, 그리고 웹사이트 매거진 “예배음악”(Worship Music)에서 음악목회에 관한 칼럼을 쓰면서 자신의 음악목회 경험과 사역을 나누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장로교출판사가 펴낸 “성공적인 예배를 위한 음악목회 프로그램”, “성공적인 예배를 위한 찬양과 경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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