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국 목사의 음악목회 이야기] 은혜와 판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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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목 “은혜와 판단”은 저에게 “율법과 은혜”라는 바울 신학의 핵심 주제를 연상하게 합니다. 자신이 복음주의자로서 복음주의 교회에게 주는 저자의 충고는 우리 모든 음악 사역자들에게 주는 진심어린 사랑의 채찍으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번역해서 올립니다. 우리를 너무 죄인 취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더라도 끝까지 한 번 읽어 보시면서 우리들이 힘을 다하여 봉사하는 음악과 예배 사역에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About Grace and judgment
Jubilate II
Church Music in Worship and Renewal
By Donald P. Hustad
그렇다면 교회 음악의 스타일에 대해 우리 믿는 자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 그리스도인은 취향과 관행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여러 문화를 초월하는 은혜의 품위(cross-cultural grace)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한 특정한 문화를 매우 잘 알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이 가능한 최선의 기능적 교회음악을 사용하고 있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헌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소통과 표현으로써 사람을 세워주는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른 청중, 즉 대화하지 않는 청중이 실제보다 더 수동적이고, 더 조종되고, 더 취향이 천박하다고 가정하는 위험이 존재한다. 교양있는 사람을 쓰레기 취급하는 일들이 세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것을 쉽게 잊을 수 있다. 게다가, 무엇이 쓰레기인지에 대한 바로 그 판단은 자신의 예상치 못한 한계로 인해 편파적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계급별로 혹은 학문상의 기득권에 의해 그럴 수 있다.”
데이비드 리스만이 위에서 언급한 지적은 예술 음악 애호가들과 세속적 팝 팬들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순전히 인류학적 접근의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보여줄 추가적인 동기부여가 있습니다. 즉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져 우리를 용납하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미적 감수성이 상했을 때에도 다른 종교 문화의 예배나 음악적 괸행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널리 퍼진 새로운 음악 스타일과 새로운 예배형식을 채택하라는 압력 떄문에 종종 혼동과 갈등이 지역교회에서 경험됩니다; 그 압력은 보통 일부 젊은 성인들에 의해 가해지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은퇴 세대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품위(은혜)를 보여주는 한 가지 방법은(교회를 든든하게 유지하려는 바람에서) 한 예배에서 서로 다른 스타일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음악적으로 매우 다양함이 경험되고 허용되었습니다, 아침 예배와 저녁 예배에서는 서로 다른 스타일의 음악으로 예배드렸고, 주일학교(어른을 포함) 예배기간 동안에는 그 밖에 또 다른 스타일들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일 학교에서는 더 이상 많은 노래를 부르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이 저녁 예배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연령층이 함께 모이는 유일한 아침 예배에서 여러 가지 스타일을 접목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여러 다른 스타일의 음악자료들을 배합하는 것을 정말로 갈망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ㅡ저는 확실히 원치 않습니다ㅡ그러나 음악 스타일에 따라 작은 그룹으로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만, 규모가 작은 교회는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실제와 관행(practice)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회중 찬송을 위해서는 표준 찬송가와 복음송 또는 경배송을, 성가대를 위해서는 일종의 앤섬(anthems)과 찬송가 편곡이나 메들리를, 그리고 솔로나 작은 앙상블을 위해서는 다양한 형식의 클래식과 가스펠과 포크나 CCM을 곁들여 특별히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공동의 목회자와 동역자들로서, 모두가 다른 모두에게 은혜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러한 관행과 실제에는 명백한 형식주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각 형식은 음악 담당자에 의해 각별한 주의와 흥미를 가지고 다루어져야 합니다. 음악 자체를 즐기는 것 보다는 가사의 의미에 관심을 끌도록 항상 대처하고 감독하는 일이 음악 목회자의 의무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모든 “찬미의 제물”은 판단력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자신을 온전히 바친 것인지를 끊임 없이 평가해야 하지만,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 우리의 최선의 찬미의 제물을 드리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각 문화의 경험과 표현의 타당성에 대한 저의 모든 변론에서, 특히 예배 예술(worship arts)을 사용하는 데 대하여 비예전적 (nonliturgical) 복음주의자들을 괴롭히는 저의 죄를 과소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은혜 안에 살라”는 격려에 따라, 제 자신이 속한다고 믿는 중산층 복음주의 문화의 일부인 향기로운 죄목들(fragrant offenses)만 열거합니다. 또 다른 것(죄)들은 요한슨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일 독자들이 이러한 죄들을 자신들의 것들로 인정한다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참회에 함께 하도록 초청합니다.
1. 자존심의 죄(The sin of pride)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양식의 중요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의 실제가 다른 기독교인들의 예배의 것보다 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 하다고 믿는 유혹을 거절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우리가 재능과 음악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탁월함을 위해 애쓰는 동안에도,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 오만이나 자부심으로 이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2. 쾌락주의의 죄 (The sin of hedonism)
유감스럽지만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교회 음악의 중심적인 의미가 재미나 “쾌락(pleasure)”일까봐 염려가 됩니다. 그들의 영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찬송가와 앤섬과 기악 음악을 사용하는 우리의 교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 죄는 단순히 카리스마적 방식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생각 없이 따라하는 비카리스마적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특별히 어떤 “조작의 유혹(invitation to manipulation)”의 관행에서 보여질 수 있습니다.
3. 관전자주의의 죄 (The sin of spectatorism)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노래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해 누군가 불러주기를 바랍니다. 사실, “음악을 듣는” 데에는 중요한 관여(involvement)와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회중 자신들이 뜻깊게 찬송에 참여하는 일이 예배에 가득하는 한 그것을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4. 감상주의의 죄 (The sin of sentimentalism)
이것은 감상주의에 대한 죄와 관련이 있으며, 선호하는 찬송이나 칸타타나 앤섬이나 솔로에 대한, 또는 선호하는 음악 스타일에 대한 편애(predilection)에서 보여져 알 수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죄는 복음주의 출판과 레코딩을 포함한 우리 퐁요로운 미국문화에 만연된 상업주의에 의해서 고무됩니다.
물론, 연주자와 작곡자는 그들의 예술성을 보상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출판과 레코딩 회사는 사업상의 이윤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최근의 노골적인 상업주의의 최종적인 결말은 복음주의 “히트송 음반 인기 순위표(hit parade)”를 만들어 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자아도취증(narcissism)과 동조 행위는 창의성을 억누르며 성서의 기준에 부합할 수 없습니다.
보다 광범위하고 어쩌면 더 의미심장한 의미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의 반발의 전통에 대하여 끈질긴 집착을 함에 있어서 감정주의의 죄가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맨 처음 종교개혁 시기 동안 로마 교회와 헤어졌고 후에 전례를 따르(liturgical) 기성 개신교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초기 시절의 폭력적인 우상파괴주의를 부추겼던(예를 들면, 예술적 상징주의의 파괴와 예배 형식의 버림) 많은 편견들이 아직 우리 곁에 있습니다. 필수 예전 (liturgy)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그것에 접근하지 않음으로써 예배의 타당성을 부정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합니다. 대신에, 예배의 실제와 자료들의 변화는 우리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의 자극적인 홍보나 경쟁의식에 대응하여 일어납니다!
그러나, 지금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리더십이 필요한 때입니다(우리의 학교와 지역 교회의 회중을 위하여), “신학의 도우미(handmaidens of theology)”로서,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종으로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우리의 예배의 질서와 예술이 최고의 소명을 다하게 되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최종적으로, 교회의 리더들은 그들의 회중들을 향하여 판단과 은혜 모두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목회자와 음악 인도자는 전통적인 음악의 표현이 회중의 특정한 공동체 문화에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회중들이 영적인 경험으로써 충분히 이해했는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예배를 위한 예술이나 그 표현과 제시에 있어서 변화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면, 그러한 변화를 만들기 위하여 끈기와 애정을 가지고 회중을 인도할 것입니다.
필자 김영국 목사는 대광고와 한양대학을 졸업하고 1974년 미국으로 이주, Hope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신학과 음악목회를 공부하였고, 척 스윈돌 목사와 그의 음악목사이며 스승인 하워드 스티븐슨의 영향을 받았으며, 27년 동안 남가주 오렌지카운티의 큰빛한인교회에서 사역하였다. 지금은 저서와 번역, 그리고 웹사이트 매거진 “예배음악”(Worship Music)에서 음악목회에 관한 칼럼을 쓰면서 자신의 음악목회 경험과 사역을 나누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장로교출판사가 펴낸 “성공적인 예배를 위한 음악목회 프로그램”, “성공적인 예배를 위한 찬양과 경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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