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꽃 이야기] Accent, 외국인과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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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민자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피부로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미국에 살면서도 오랜 세월을 한인공동체 속에서 인종과 언어의 장벽을 전혀 느끼지 않고 지내다가 꽃가게가 백인들 주거지역에 위치한 관계로 인해 갑자기 삶의 중심이 백인들 사회로 옮겨지면서 우리는 새로운 문화충격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말하지는 않지만 나는 매일 그들을 대하고 접하면서 내가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고, 아무리 혀를 꼬부리고 굴리며 말을 해도 튀어나오는 액센트는 내가 외국인임을 날마다 확인시켜줍니다. 그리고 이 넘을 수 없는 인종의 장벽, 언어의 장벽은 이 땅에 오래 산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대학시절 미주리주에서 기숙사 생활도 했고, 오클라호마에서 신학교를 다니면서 많은 미국인 친구들을 사귄데다가, 30여 년간 통역 설교도 많이 했고, 또한 교인들을 가르치느라 영어교재 번역도 꽤 많이 했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언어의 핸디캡은 적은 편이라 생각했는데 꽃가게를 하면서 그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자존심은 완전히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처음엔 전화로 주문받는 여자분이 있어서 배달과 정리에만 신경을 쓰면 됐는데 아내와 둘이서만 가게를 운영하면서 전화 주문받는 일도 우리의 주 업무가 되었습니다.
고객들이 전화로 꽃을 주문하면 12가지 정도의 질문을 해야 하는데, 주문하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 받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와 주소, 어떤 꽃을 원하는지, 값은 얼마짜리로 해야 하는지, Standard, Deluxe, Premium 중 어떤 사이즈를 원하는지, 배달은 어느 날짜에 몇 시가 좋은지, 카드에 들어갈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인지, 영수증과 delivery confirmation을 위해 이메일주소도 물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크레딧카드 번호와 expiration date, security code, billing zip code를 받아적으면 드디어 주문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화로 들려오는 상대방의 말과 발음을 알아듣기 힘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름, 주소, 이메일주소와 메시지 내용을 받아적을 때 b와 v, d와 t, m과 n, g와 z 심지어 f와 s도 구분이 잘 안 돼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물을 때가 많습니다.
만일 이름이나 주소 또는 메시지에서 스펠링이 틀리면 아주 촌스럽고 이상한 단어가 되어버려 전체 주문을 망치게 되고, 이메일주소에서 한 자라도 틀리면 아예 전달도 안 되기 때문에 오자 없이 완벽하게 주문을 완성하려면 대단히 긴장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정확히 일러준다고 그 까다로운 이름이나 기다란 이메일주소를 일일이 e-edward, h-henry, s-sam, u-united, n-nancy라고 스펠링을 불러주면 중간쯤 가다가 더 헷갈려버립니다.
그래도 외국인들을 많이 접해본 고객들은 대체로 이해심과 참을성이 많지만 자기들 사회에서만 살던 백인들 가운데는 동양인의 액센트에 대한 관대함과 참을성이 전혀 없는데다가 고객의 말을 잘 못 알아듣고 두 번, 세 번 되풀이해 묻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화를 내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 번은 어느 여인의 주문을 받으면서 내용을 실수하여 기록함으로 사고가 난 적이 있는데 그녀는 우리 웹사이트에다 ‘이 가게에 주문을 할 때 액센트가 있는 남자가 전화를 받으면 절대 그에게 주문하지 말라 그는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혹독한 review를 올렸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마음을 상하게 했던지 난 그 여인에게 전화를 걸어 왜 실수의 내용이 아닌 액센트를 가지고 시비를 거느냐고 항의를 했고, 그녀로부터 사과를 받기는 했지만 그 상처의 여운은 오랫동안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앞으로 꽃을 주문할 때 내가 전화를 받으면 얼마나 꺼림직할까 생각하니 전화를 받고 싶은 마음조차 없어져 버렸습니다.
부정적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치는지 나는 그 여자를 통해 톡톡히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23세에 미국에 와서 배운 영어라서 그런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 액센트는 없어지지 않는 핸디캡입니다.
우리가 그 핸디캡을 커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탁월한 디자인과 신속하고 정확한 배달로 신용을 얻는 길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에 언어의 약점을 실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지금은 워낙 많이 하다 보니 주문받는 것이 꽤 익숙해졌지만 액센트는 여전히 튀어나오고 있고, 또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항상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떠난 지 43년이란 세월이 흘러 미국에 산 날이 한국에서 산 날의 거의 두 배가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내 혀는 한국식으로 돌아가며 액센트의 장벽은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이민 온 지 한 10년쯤 되어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했을 때 아침에 눈을 뜨자 밖에서 들려오는 한국말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황홀했고, 길거리에 나가보니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감격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액센트 없이 말을 할 수 있고, 머릿속에서 주어 동사 목적어를 늘어놓으며 작문을 하지 않아도 술술 나오는 한국말이 얼마나 감사했던지….
전화주문을 받을 때마다 셀 수 없이 되풀이하는 우리 가게 이름,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오기가 쉽지 않은 ‘Lake Ridge Florist'를 액센트 없이 발음하기 위해 혼자서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연습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섞여나오는 액센트가 나는 이 땅에서 어쩔 수 없는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줍니다.
이근호(다니엘) 목사는 1977년에 도미, George Mason 대학에서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Central Bible College와 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학 전공했으며, 1987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30년간 이민 목회와 함께 지난 25년간 미국 전역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했고, Billy Graham의 LA Rose Ball 전도집회에서 통역 설교를 담당했다. 2017년 목회직을 사임한 후 2018년 2월부터 버지니아에서 Lake Ridge Florist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물이 흐르는 곳에 식물은 자란다"(베드로서원),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더 감동 있는 삶"(쿰란출판사), 다니엘 꽃이 야기(Daniel's Flower Story)"(도서출판 레드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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