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목일기] 영화 《암살자(들)》 논란 — 영화는 영화로 즐기면 그 뿐, 음모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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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허진호 감독의 영화 《암살자(들)》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이 영화는 1974년 8월 15일 발생한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과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영화가 당시 중앙정보부의 개입 가능성, 나아가 박정희 정권의 자작극 가능성까지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역사 왜곡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어 역사학자 이완범이 2007년 《역사비평》 제80호에 발표한 「김대중 납치사건과 박정희 저격사건」이라는 44쪽 분량의 논문을 읽었다. 아울러 당시 한국과 일본의 수사 결과, 미국 국무부가 30여 년이 지난 후 공개한 외교문서, 그리고 2007년 노무현 정부 당시 진행된 진실화해위원회의 최종 종합보고서까지 살펴보았다.
1974년은 1973년과 연결되어 있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1974년 문세광 저격 사건의 원인(原因)이자 근인(近因)이 되었던 것이다. 이 두 사건을 함께 살펴보면 현재 논란이 되는 많은 부분이 풀린다.
먼저 1973년 8월 8일의 김대중 납치 사건을 살펴보자. 당시 일본 도쿄에서 반유신 망명 활동을 벌이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은 그랜드프린스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한국으로 비밀리 끌려왔다. 자국 영토 내에서 벌어진 주권 침해 사건에 일본 정부는 격앙했고, 사건은 순식간에 한일 간 초대형 외교 문제로 비화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을 도덕적·외교적 외통수로 몰아넣으며 유신 체제에 대한 국내외적 비판을 극대화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놀랍게도 세계 최강의 정보력을 가진 미국은 사건 직후부터 중앙정보부의 소행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1973년 8월 15일,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는 워싱턴에 보낸 비밀 전문 (SEOUL 5409)에서 이 사건을 한국 정부가 주도한 공작으로 판단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미국대사관은 정부 개입을 부인하는 한국 측의 설명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2007년 10월 24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실행되었으며, 이후 중앙정보부가 조직적으로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박정희의 직접적인 지시는 확정하지 못했지만, 박정희가 이 작전의 실행을 알고 있었고 최소한 묵시적인 승인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여기에는 당시 미국의 외교 정보, 중앙정보부 내부 문건, 관련자들의 증언, 그리고 국가기관의 재조사 결과라는 엄연한 근거가 존재한다.
자, 그렇다면 이듬해 발생한 문세광 저격 사건은 어떠한가?
1974년 12월 27일 주일 미국대사관이 워싱턴에 보낸 비밀 전문(TOKYO 16855)은 일본 경찰의 수사 결과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역사학자 이완범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처음부터 문세광 저격 사건의 배후가 중앙정보부일지 모른다고 의심했다는 사실이다.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외교적 수세에 몰린 박정희 정권이 국면을 전환하고 유신체제를 강화하고자 사건을 꾸몄을 것이라는 의심이었다.
그런데 이런 의심을 가졌던 일본 측의 문세광 조사는 의외로 심플했다. 문세광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성장한 재일한국인 2세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 등 정치·사회 단체와 관계를 맺으며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키워갔다. 특히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깊은 분노를 느끼며 ‘김대중 구출대책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본 경찰은 문세광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독재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강한 정치적 신념을 품게 되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으로 판단했다. 이는 1974년 12월 25일 일본 경찰청이 최종 발표한 수사 결과의 핵심 내용이었다.
미국 측에 보낸 일본 경찰의 수사 보고서 역시 문세광이 1973년 9월경 박정희 암살을 스스로 결심한 것으로 판단했다. 문세광은 내연관계였던 한 일본인 여성의 도움으로 여권 관련 서류를 준비했고, 그해 11월에는 위조여권으로 홍콩에 가서 무기를 구입하려다 실패했으며, 1974년 7월 18일에는 오사카의 파출소에서 권총을 탈취했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8월 6일 그 권총을 가지고 서울로 향했다.
이러한 일본의 보고서는 문세광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 박정희 암살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완범의 논문에 소개된 문세광의 유서에서도 자신의 행동이 한국에서 혁명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기를 바랐다는 취지의 내용이 확인된다.
한국 정부는 문세광의 범행이 북한과 조총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일본 경찰은 북한이나 조총련이 조직적으로 지휘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문세광의 자금 출처와 일부 관련 인물의 역할도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다. 조총련 관계자들과의 접촉이나 도움을 받은 문제는 별도로 검토하더라도, 문세광이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점은 현재로서 가장 분명하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수사보고서를 받은 미국 측의 반응이었다. 1974년 8월 21일 주한 미국대사관이 작성한 비밀 전문(SEOUL 5480)은 당시 상황을 흥미롭게 분석한다. 미국대사관은 한국 정부가 문세광 사건과 관련해 일본의 책임을 강하게 추궁하면서 일본을 외교적으로 수세에 몰아넣고 있으며, 이것이 김대중 납치 사건 수사 종결에 대한 일본 측 반발을 누그러뜨리려는 목적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 측의 어떤 보고서에도 박정희나 중앙정보부가 문세광의 범행을 사전에 지시하거나 공작에 참여했다고 기록하지 않는다. 만약 문세광의 박정희 암살 시도와 육영수 여사 시해가 실제로 중앙정보부의 공작이나 박정희의 암묵적 지시에 의해 진행된 일이었다면, 당시 미국의 정보부가 그것을 사전이나 사후에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다.
물론, 당시 일어난 일련의 일들과 수사 전반에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장한 문세광이 어떻게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장에 비표도 없이 들어갈 수 있었는지, 당시 경호실은 왜 그토록 허술했는지, 실제 육영수 여사를 사망하게 한 총탄이 문세광의 권총에서 발사된 것이 맞는지, 탄두 수거와 감정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등은 여전히 검토할 가치가 있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의심만으로 역사를 확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김대중 납치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다. 그것을 실행한 중앙정보부와 이후락의 책임도 확인되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에 관한 국가기관의 판단도 존재한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벌어진 정치적 탄압과 인권침해 역시 역사적 기록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문세광의 박정희 암살 시도 사건은 여전히 문세광의 단독범행이라는 증거가 훨씬 더 유력하다. 이와 관련하여 2007년 7월, 노무현 정부 시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8·15 저격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를 결정했다. 그렇다면 그 조사는 어떻게 끝났을까?
2010년 발간된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제1권 68쪽을 직접 확인해 보니, '8·15 저격 사건 경위'의 처리 상태가 명시되어 있었다. 바로 '조사중지'였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박정희 정부와 중앙정보부의 공작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공중에서 폭파된 대한항공 비행기 사건도 북한의 소행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위원회가 바로 그 진실화해위원회였다.
그럼에도 문세광 암살 사건에 대해서는 ‘조사중지’ 결정이 내려졌다. 조사중지의 구체적인 사유는 종합보고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지만, 통상 기존의 판단을 뒤집을 만한 증거나 기록을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을 때 조사중지를 결정한다. 적어도 이 공식 보고서에 박정희 정권의 자작극을 확인했다는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영화는 영화로 즐기면 그 뿐, 입증된 역사 이상으로 시선을 삐딱하게 하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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