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목일기] 하나님은 다른 길로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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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저는 은사이신 류호준 교수님을 뵙고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교수님은 올해 사순절에 하온출판사에서 출간된 새 책 한 권을 제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제목은 『하나님은 다른 길로 오신다』입니다.
류호준 교수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저는 다른 설교자들의 글에서는 쉽게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낯섦’(strangeness)을 느끼곤 했습니다. 익숙한 성경 본문인데도 교수님의 손을 거치면 갑자기 낯설어집니다. 너무 많이 들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말씀이 어느 순간 처음 듣는 말씀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낯섦의 틈을 뚫고, 벼락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내리꽂힙니다. 이번 책도 그렇습니다.
책의 제1부 제목은 「하나님이 먼저 오신다」입니다. 그 가운데 한 장의 제목은 더욱 낯섭니다. 「성육신은 위로가 아니라 침입이다」.
‘침입’이라니요. 성육신을 사랑이나 위로, 낮아지심(비하)이라고 말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침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생경합니다. 교수님은 책의 후반부에서 이것을 “divine incursion(하나님의 돌입)”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충돌하며 그 안으로 달려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저 멀리 정적으로 머문 채 우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데 그치는 나라가 아닙니다. 낯선 하나님의 세계가 우리의 익숙한 세계를 향해 돌진해 들어옵니다. 라틴어 incursio 자체가 in(안으로)과 currere(달리다)에서 유래한 말이니, 말 그대로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그 말씀은 낯설지만 다이내믹합니다.
성육신이 바로 그 정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의 종교적 가능성이 조금씩 고양되어 마침내 하나님께 도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낼 수도 예상할 수도 없는 곳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의 세계 안으로 뛰어드셨습니다.
제2부는 「말씀이 삶을 뒤집는다」입니다. 그 가운데 이런 제목이 있습니다. 「텅 빈 그물이 때로는 인생을 바꾼다」.
우리는 가득 찬 그물이 인생을 바꾼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하고, 이루고, 채우고, 얻어야 인생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로 아무것도 잡히지 않은 텅 빈 그물 앞에서 사람을 만나십니다.
다시 ‘다른 길’입니다. 내가 기대했던 성공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실패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손에 가득 쥐었을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제 인생의 길을 향한 교수님의, 아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제3부의 제목은 「길 위에서 결단하다」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 붙은 문장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걸어본 사람만이 길을 안다」.
이 말은 이제 제게 단순한 문학적 표현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병원과 호스피스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깨닫게 된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 본 사람만 아는 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땅에 묻어본 부모만 아는 길이 있습니다. 병들어 자신의 몸이 하루하루 무너지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만 아는 길이 있습니다. 실패해 본 사람, 버림받아 본 사람, 억울함을 삼켜본 사람,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긴 시간을 견뎌본 사람만 아는 길이 있습니다.
밖에서 그 길을 바라보며 설명하는 것과 직접 그 길을 걷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제목, 「우리는 아직 길 위에 있다」라는 말이 제게는 너무나 깊이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실패가 내 인생에 대한 최종 판결도 아니고, 지금의 상처가 내 존재에 대한 마지막 설명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길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길 위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제4부의 제목은 「은혜는 버는 것이 아니다」입니다. 여기에는 더욱 도발적인 제목이 등장합니다. 「은혜를 탕진하시는 하나님」.
처음에는 ‘하나님’과 ‘탕진’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있는 것이 어색했습니다. 탕진은 대개 부정적인 말입니다. 아껴야 할 것을 헤프게 써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잘 보여주는 표현도 드물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계산해서 나누어주지 않으십니다.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투자하지 않으십니다. 허랑방탕했던 둘째 아들, 사회적으로 별 볼 일 없는 사람, 실패한 사람, 병든 사람, 죄인이라 손가락질받는 사람, 아무런 특권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마치 은혜가 남아돌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낌없이 쏟아부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우리의 셈법이 없습니다. 구별하여 아끼지도, 자격을 따져 제한하지도 않으십니다.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주저함 없이 받아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런 사람에게까지도요?” 네. 저에게까지도요.
그리고 제5부에 이르면 이야기는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새로운 세계’로 향합니다. 저는 ‘새로운 세계’라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예수께서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조금 더 착하고 행복하게 개량한 세계가 아닙니다. 죽음과 죄와 폭력이 최종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이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다시 놀라운 제목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역사 안으로 뛰어드셨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은 다른 세계의 침공이다」.
앞서 말한 divine incursion, ‘하나님의 돌입’이 여기서 절정에 이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육신에서 하나님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 안으로 돌입해 들어왔다면, 부활에서는 죽음이 마지막 말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닫힌 세계 안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밀고 들어옵니다.
부활은 단지 죽었던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기적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가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었던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책 후반부에서 교수님은 우리가 “우리가 사는 세계의 틀”에 갇혀 있으며, 익숙한 경험과 범주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여시는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새로운 세계로부터 예수의 부르심이 들려옵니다. 그분이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가 사는 세계 너머에 펼쳐진 부활의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보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 대목들을 읽으며 눈물이 났습니다. 이 글들이 단순한 신학적 에세이로만 읽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나의 일상에도, 억울함을 삼키며 지나온 시간에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unnoticed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빛이 느닷없이 밀고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전율하는 순간처럼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저 초월의 세계로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건너오시는 말씀.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확인하고 승인해 주는 말씀이 아니라, 그 세계를 깨뜨리며 들려오는 말씀. 마치 벼락처럼.
성육신은 위로가 아니라 침입이다.
텅 빈 그물이 때로는 인생을 바꾼다.
걸어본 사람만이 길을 안다.
우리는 아직 길 위에 있다.
은혜를 탕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역사 안으로 뛰어드셨다.
부활은 다른 세계의 침공이다.
그 주제들에는 하나의 일관된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저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예상했던 곳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 자격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서 자격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로. 가득 찬 그물에서 텅 빈 그물로. 성공의 자리에서 실패의 자리로.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죽음 너머에서 다시 삶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얌전히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른 길로 오십니다.
어쩌면 이것이 제가 27년 동안 류호준 교수님의 글에서 반복해서 경험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길들여놓은 하나님을 다시 낯설게 하고, 우리가 안전하게 정리해놓은 말씀을 다시 위험하게 하고, 너무 많이 들어 더 이상 가슴 뛰지 않는 복음을 다시 벼락처럼 들려줍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저는 은퇴한 그 스승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말씀에 닻을 내린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다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 말씀에 오래 닻을 내릴수록 하나님은 더욱 크고, 더욱 놀랍고, 때로는 더욱 낯선 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는 것을.
내가 예상했던 길이 막혔다고 해서 하나님의 길까지 막힌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분에게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조차, 하나님은 저 멀리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여전히 길 위에 있는 우리를 향해, 우리의 익숙하고 닫힌 세계를 깨뜨리며, 느닷없이, 벼락처럼, 하나님은 다른 길로 오십니다.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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