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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1편 바다: 바다에서 인간은 자기 영혼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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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6-08 | 조회조회수 : 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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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바다를 사랑합니다. 한동안 바다 가까이에서 살았던 적도 있습니다. 바다는 바라볼 때마다 인간의 마음을 깊은 곳으로 데리고 갑니다. 바다는 넓고, 인간은 작습니다. 바다는 오래되었고, 인간의 하루는 짧습니다. 그 넓은 바다 위로 한 노인이 홀로 나아갑니다. 배는 작습니다. 손은 늙었습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다시 노를 젓습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바다는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바다는 한 인간이 자기 존재의 바닥과 마주하는 자리입니다. 산티아고가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생계를 위한 출항이면서, 동시에 자기 고독, 한계, 소명, 그리고 영혼의 깊은 심연속으로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바다는 바다입니다. 헤밍웨이는 바다를 낭만적인 풍경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그의 바다는 아름답지만 친절하지 않습니다. 푸른 수평선과 햇빛이 있지만, 그 아래에는 어둠과 깊이와 알 수 없는 생명들이 움직입니다. 바다는 쉽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쉽게 위로하지도 않습니다. 바다는 인간에게 박수를 보내지도 않고, 변명할 자리도 주지 않습니다. 그 침묵 앞에서 인간은 자신을 과장할 수 없습니다. 늙은 어부가 가진 것은 작은 배, 낚싯줄, 오랜 경험, 상처 난 손,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뿐입니다. 이 작품에서 바다는 자연이면서 삶입니다. 생계의 터전이면서 운명의 자리입니다. 동시에 인간 실존의 광야입니다.


바다에 사랑이 있습니다. 산티아고는 바다를 단순한 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헤밍웨이는 산티아고가 바다를 차갑고 거친 대상으로만 대하지 않게 합니다. 그는 바다를 사랑합니다. 바다는 위험하지만 친밀합니다. 두렵지만 아름답습니다. 때로 빼앗아 가지만, 동시에 살아가게 합니다. 산티아고에게 바다는 정복해야 할 물체가 아닙니다. 그는 바다를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려 합니다. 바로 여기에 『노인과 바다』의 깊은 품위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오만한 승리를 노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보다 큰 세계 앞에서 어떻게 존엄을 지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다는 알레고리 이상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눈으로 읽을 때, 우리는 이 지점을 조심스럽게 붙들어야 합니다. 『노인과 바다』를 단순한 기독교 알레고리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산티아고는 베드로가 아닙니다. 청새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바다는 교회도, 세상도, 사탄도 하나의 공식처럼 의미하지 않습니다. 헤밍웨이는 설교자가 아니라 소설가입니다. 그는 설명보다 장면을 보여 줍니다. 교리보다 몸의 고통, 침묵, 손의 상처, 물고기의 무게, 밤바다의 외로움을 그립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정직한 묘사 속에서 신앙적 성찰의 문이 열립니다. 인간은 자기보다 큰 세계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그 질문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바다를 만드신 분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연을 신격화하지 않습니다. 바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바다는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다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입니다. 바다는 인간에게 경외를 가르칩니다. 인간은 피조 세계 앞에서 주인이기 전에 청지기입니다. 정복자이기 전에 맡겨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과 바다를 맡기셨다는 말은 함부로 파괴하고 착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돌보고, 다스리고, 책임지라는 부르심입니다. 산티아고가 바다와 청새치를 대하는 태도에는 바로 그런 경외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는 싸웁니다. 그러나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는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함부로 낮추지 않습니다. 그는 생존을 위해 낚싯줄을 붙듭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생명을 존중합니다.


성경에서도 바다는 두 얼굴을 가집니다. 바다는 생명의 자리이면서 두려움의 자리입니다. 시편 107편은 바다로 내려가 배를 타는 사람들이 큰 물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본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파도 속에서 흔들리고, 영혼이 녹아내리는 듯한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깊은 물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봅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 제자들도 풍랑 속에서 무너집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바다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풍랑 앞에서 자신들의 경험과 기술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바다는 인간의 불안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권세를 드러내는 자리가 됩니다.


바다는 단순히 감상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바다는 혼돈입니다. 바다는 위험입니다. 바다는 인간의 계획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깊은 물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혼돈의 물 위에 말씀으로 질서를 세우신 분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바다 가운데 길을 내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분입니다. 요나의 하나님은 선교의 부르심을 피해 도망가던 선지자를 바다 한가운데서 다시 만나신 분입니다. 바다는 두려움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시 들리는 장소입니다. 인간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물 위에서,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바다가 있습니다. 목회자는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상처와 눈물을 품고 깊은 물로 나아갑니다. 선교사는 낯선 언어와 문화의 파도 속으로 작은 배를 띄웁니다. 신학자와 교수는 학문의 깊은 물 앞에서 씨름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미래라는 불확실한 바다를 바라봅니다. 은퇴를 앞둔 사람은 사라지는 역할과 남은 소명을 함께 끌어안습니다. 다음 세대를 세워야 하는 교회는 세속화, 탈종교화, 이주와 디아스포라, 문화적 혼란이라는 거친 물결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바다는 서로 다르지만, 그 바다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질문은 서로 닮아 있습니다.


산티아고의 위대함은 바다를 완전히 이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바다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연을 정복한 영웅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다 앞에서 자신의 작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지칩니다. 손은 찢어집니다. 몸은 무너집니다. 거대한 청새치를 붙들었지만, 결국 상어들이 그 살점을 뜯어 갑니다. 항구로 돌아온 그의 배에는 온전한 승리의 전리품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거대한 뼈대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뼈대가 증언합니다. 이 노인은 헛되이 싸운 것이 아닙니다. 바다는 그의 손에서 물고기의 살을 빼앗았지만, 그의 영혼에서 존엄을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서 헤밍웨이의 정신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패배처럼 보이는 자리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상처를 입어도 자기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외로워도 끝까지 줄을 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인간의 존엄은 단순한 의지의 힘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소망은 인간의 끈기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에 있습니다. 산티아고의 인내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 앞에 무릎 꿇게 합니다. 노인의 상처 난 손이 인간의 존엄을 보여 준다면, 못 박히신 주님의 손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믿음은 인생의 바다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풍랑 속에서도 주님이 배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닙니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다 앞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다를 보며 자신의 작음을 깨닫지만, 동시에 그 바다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크심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얕은 물가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설명 가능한 일, 통제 가능한 관계, 예측 가능한 내일 안에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깊은 물로 부르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에게 깊은 물은 실패의 기억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밤새 수고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실패의 바다가 순종의 바다가 되었고, 빈 그물이 사명의 그물이 되었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는 안전한 해변에서 세상을 논평하는 일이 아닙니다. 선교는 복음을 들고 깊은 물로 들어가는 순종입니다. 낯선 문화, 낯선 언어, 낯선 역사, 낯선 상처를 향해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배웁니다.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 곧 missio Dei를 다시 보게 됩니다. 교회는 바다를 피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이 명하시는 깊은 물을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더 깊은 바다로 나갈 때, 우리는 더 크신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산티아고의 작은 배가 새벽 바다로 나아갈 때, 그것은 한 노인의 직업적 습관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오래된 장면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배를 타고 알 수 없는 바다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깊은 물 위에서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는가? 누구의 부르심을 따라 이 길을 가는가? 누구를 의지하여 이 풍랑을 건너는가?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 위에 별이 빛납니다. 그 별 아래에서 인간은 자신의 작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별을 지으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바다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풍랑 속에서도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음성 앞에서 우리의 작은 배는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바다에서 인간은 자기 영혼을 만납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그 영혼은 마침내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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