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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일기]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12시간뿐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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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2-02 | 조회조회수 : 4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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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성빈센트 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여느 때처럼 원목 회진을 돌던 중,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습니다. 50대 중후반의 흑인 여성. 폐와 호흡기 질환이 깊어 두세 달에 한 번은 꼭 병원을 찾던 환자였습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그녀의 몸에서 나온 벌레가 병실을 날아다닌다며 간호사와 보조사들이 기겁을 하며 출입을 꺼리던 이른바 까다로운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스텝들에게는 종종 가혹했던 그녀가 유독 원목인 저만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제가 방문할 때마다 제 손을 꼭 잡고 기도를 청했고, 평소 좋아하던 성경책을 챙겨달라 부탁하곤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가 가장 기다렸던 것은 단어 맞추기와 수도쿠가 실린 작은 잡지였습니다. 입원해 있는 3~4일 동안 그 퍼즐을 푸는 것이 유일한 위로라며, 그녀는 매번 저를 불러 퍼즐북을 찾았고 기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다시 준중환자실(PCU)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름을 확인하고 병실로 달려갔을 때, 그녀는 마침 CT 촬영을 위해 이동 침대에 실려 1층으로 내려가던 참이었습니다. 이동을 돕던 조무사가 저를 알아본 그녀의 인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춰주었습니다. 그녀의 목에는 기관절개술의 흔적이 선명했고, 숨을 쉬거나 말을 하려 할 때마다 붉은 피가 조금씩 배어 나왔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녀가 힘겹게 꺼낸 한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I love your visit with the puzzle book and prayer. Please, visit me later with it.” (목사님이 퍼즐 북을 들고 찾아와 기도해 주시는 게 정말 좋아요. 나중에 꼭 그걸 들고 다시 와주세요.)


수척해진 얼굴과 상처 난 목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저려 왔습니다. 1년 전 처음 만났을 때보다 상태는 눈에 띄게 악화되어 있었고, 만날 때마다 그녀의 생명력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습니다. 곧 점심시간이었기에, 저는 그녀가 검사를 마치고 돌아올 오후에 다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사무실 서재에서 그녀에게 줄 퍼즐 북을 미리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하지만 병원의 시간은 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날은 하필 긴급 상황을 처리하는 온콜(On-call) 당번이었고, 호출기는 쉴 새 없이 울려댔습니다. 쏟아지는 응급 상황들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덧 하루가 저물었고, 결국 그녀의 병실로 향할 틈을 내지 못했습니다. ‘내일 아침 회진 때 제일 먼저 찾아봬야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퇴근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준비해 둔 퍼즐북을 들고 서둘러 준중환자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머물던 병실은 이미 비어 있었고, 낯선 환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으로 차트를 열어보았습니다. 기록지에 적힌 차가운 문장. 그녀는 금요일 새벽 12시 30분,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인한 코드 블루 상황 속에서 사투를 벌이다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손에 든 퍼즐북을 힘없이 수간호사 데스크에 맡겨두고, 한참 동안 빈 병실 앞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미안함과 허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저보다 고작 다섯 살 정도 많았던, 누님 같은 분이었는데. 무엇이 그리 급해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나셨을까. 하루만, 아니 단 몇 시간만 더 기다려 주셨다면 그토록 좋아하던 퍼즐 북을 건네드릴 수 있었을 텐데. 마지막 가는 길에 기도라도 해드렸어야 했는데….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던 병원 복도의 그 찰나의 순간,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겨우 12시간뿐이었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가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생각은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원목의 사역은 이처럼 찰나의 순간을 붙잡아 영혼을 섬기는 일입니다. 때로는 준비한 위로가 허공으로 흩어지고, 간절한 마음보다 죽음이 한 발짝 먼저 도착하는 안타까운 순간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믿습니다. 비록 퍼즐 북은 제 손에 남았지만, 그동안 나누었던 대화와 기도는 찰나의 시간을 넘어 영원한 기억으로 남을 것임을.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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