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종말과 새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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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에 땀을 흘리면서 읽던 책을 다시 꺼내어 읽었습니다. 오래 간직하며 틈틈이 읽어 너덜너덜하게 나누어졌던 책을 쓰레기 통에 버리면서 책을 보았습니다. 1차 대전에서 아버지를 잃고 2차 대전에서 포로로 잡혔던 폴 리꾀르(Paul Ricoeur, 1913-2005)가 전쟁 후에 묵상했던 인간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성찰은 색다른 깨달음으로 우리에게 의미를 던져줍니다. 그는 자신의 책 ⌜역사와 진리⌟를 통하여 역사에는 3가지의 지평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면, 첫 번째로 발견되는 역사의 합리적 지평이 있습니다. 역사에는 여러 다양한 지평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그 첫째는 진보(progress)로 설명되는 역사의 기술적(技術的) 차원입니다. 기술은 계속 발전했습니다. 오랫동안 지식의 축적과 확대가 있었고, 기술문명은 후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많은 과학기술과 지식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두 번째로 발견되는 역사의 지평은 비합리적인 지평입니다. 인간을 마음의 견지, 즉 윤리적 차원에서 보면, 거의 아무런 발전도 이루어졌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욕망은 올곧은 안티고네를 죽인 크레온 왕이나 자신의 딸을 죽이고 트로이 전쟁을 떠난 아가멤논이나 자신의 손주들을 모두 죽이고 여왕이 된 아달랴나 전혀 다름이 없습니다. 인간성은 진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호함(ambiguity) 속에 남아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은 필요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발견되는 역사의 차원은 초합리적인 지평입니다. 인간은 기술적으로 진보해왔지만, 윤리적으로 더욱 품성이 개선하였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말세의 마지막에 이르도록 인성은 더욱 피폐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는 하나님의 기적적, 초합리적 개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종결됩니다. 역사 속에 하나님은 성육신과 십자가로 임하셨으며, 부활과 승천으로 소망을 심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그 암울함에도 불구하고 소망의 관여와 초자연적 개입이 숨 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신비(mystery)입니다. 신비를 기대하는 우리에게는 소망이 잉태됩니다.
어거스틴이 역사는 “하나님의 신비”(divine mystery of history)라고 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역사가 버려진 것이 아니고, 비극 속에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실을 보면 비관적이라 하더라도, 미래에는 낙관이 자리합니다. 이를 “비관적 낙관주의”(pessimistic optimism)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죄악된 역사에 이스라엘의 선택과 그리스도의 잉태가 있고, 교회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 절망스런 현재의 역사도 하나님의 개입으로 개선될 수 있는 미래의 영광이 살아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의 내려옴은 이러한 역사의 긍정적인 마무리를 보여주는 찬란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동거로 우리 인간에게 새 예루살렘이 펼쳐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향악으로서 역사”(divine symphony of history)를 기대하게 합니다. 역사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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