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1] : 김홍우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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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라는 말이 너무 공식적인 것 같아서, 학생들은 대부분의 교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 편하다. 김홍우 선생님을 통하여 가장 많은 도전을 받았기에, 그리고 늘 선생님의 모습이 잔영에서 떠나지 않기에, 선생님은 내 마음의 고향인 것 같다. 결혼 전에 아내를 데리고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이 아가씨 어떠세요?” 지금은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아내에 대한 겸손한(?) 소개를 간신히 했는데, “자네 인물보다 훨 낫구만”이라고 말씀하셔서 모두가 웃었다.
3년 동안의 대학원 기간 동안 거의 한 학기도 빠짐없이,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조교를 하는 동안, 나는 지속적으로 선생님의 세미나에 들고 나가면서 꼴을 얻었다. 나의 서양 고전에 대한 체험은 거의 선생님의 세미나를 통하여 접한 것이다. 늦게 미국으로 유학을 결정할 때, 선생님은 너무 좋아하시면서 학교 꼭대기의 교수식당에서 밥을 사주셨다. 신학으로 전과를 할 때에는 추천서를 써주시면서 “이제 갈 길로 간다”고 더욱 즐거워하셨다. 학위를 마친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한동대 교수로 옮기겠다고 하니까, “신학계를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미국으로 목회를 하러 가야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선생님은 즐거워하시면서 모든 독립신문 강독회 후배들과 함께 환송파티를 하여주셨다.
선생님에 대한 추억 중 호되게 비판당한 것을 잊을 수 없다. 함께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읽던 정치학과 석사, 박사과정 학생들이 아모스 선지자에게 대하여 내게 물었을 때, 나는 별 생각 없이 아모스에 대한 일반적인 자료들을 복사하여 돌렸다. 선생님은 “프로훼셔널(전문가)이 형편이 없으니 아모스 같은 아마추어(일반인)를 하나님이 쓰셨다”고 날선 말씀으로 나를 책망하셨다. 나는 학교로 돌아와 교수실에 누워서 자정이 넘도록 퇴근을 하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처음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에 열심히 써간 논문의 서론을 단어 하나만 남기고 모두 연필로 긋던 때의 충격과 흡사하였다.
그 선생님이 벌써 정년을 맞으셨다. 다른 선생님들은 국회위원도 되고 국무총리가 되기도 하였지만, 선생님은 명예롭게(?) 교수의 길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걸어가셨다. 언젠가 선생님은 걱정하셨다. “이제는 공부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아이들이 고시하러 학교에 온다.” 이는 목회자인 나의 환경에서는 이렇게 해석된다. “이제는 교인이 복음 때문이 아니라 세상 문제 때문에 교회에 온다.” “이제는 목사가 예수 때문이 아니라 떡 때문에 일한다.”“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는다”(요 10:9)는 예수님의 말씀에 선생님과의 세미나가 생각이 났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생각하면 그리운 선생님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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