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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다스림과 악한 사회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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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7/31(토)


                         하나님의 다스림과 악한 사회 구조

  노예의 매매를 용납할 수 있는가?  히틀러가 저지른 600만 유대인 학살을 긍정할 수 있는가?  미국역사의 초기에 있었던 수백만 인디언 살육은 어떠한가?  르완다의 100만 인종청소를 손쉽게 수긍할 수 있는가?  비일비재하게 반복되는 부도덕한 로비와 정경유착, 그리고 각양 구조적인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가?
  파괴적인 영향을 장기간에 걸쳐 미치는 구조악(structural evil)의 문제는 한 개인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죄악이 아니다. 이 악은 따라서 한 영향력 있는 개인이 회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므로 해결되는 것 또한 아니다. 이러한 악은 어느 정도 도덕적인 개인의 판단과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집단과 구조에 의하여 저질러 진 죄악이기 때문에, 어떤 집단의 사회적 회심(social conversion)과 구조적 변혁 없이는 그 변화가 불가능하다. 이는 이미 걸출한 미국의 사상가이자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가 그의 책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에서 간파한 것처럼, 도덕적인 개인의 능력이 쉽게 미치지 못하는 비도덕적인 사회의 상대적 자율성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구조악의 특징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극복이 가능한 것인가?  아울러 하나님의 통치는 이러한 악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신자의 사회적 소명이란 이러한 구조악과 어떻게 관련을 가질 수 있는가?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변을 찾아보려고 한다.

I. 은밀하게 숨겨진 구조악
  
  세계는 크고 작은 악으로 가득 차 있다. 교육과 합리적 이성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너무도 잔인한 악이 창궐하고 있다. 그러나 악의 정체를 파악하여 그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악은 늘 교묘하게 위장되기 때문에, 악한 일에 대한 접근과 파악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울러 악이 늘 그러하듯이 그것이 강력한 권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때, 그 악을 폭로하는 사람은 종종 공격의 표적이 된다. 어떤 사람이 용기 있는 내부 고발자가 되어 악을 폭로하는 것은 그것이 가져오는 핍박과 고난을 감당할 각오를 필요로 한다.    
  더욱이 악이란 그것이 조직적이고 거대할수록 자신을 은밀하게 숨기려는 특성이 있다. 악인들은 그 악을 숨기기 위해 철저한 내부의 교육, 탈퇴시의 가혹한 징계, 단체정신의 고양 및 자긍심 앙양을 통하여 결속을 강화한다. 그 결과 악은 정신적인 점거와 세뇌, 일반화된 편견(general bias)의 유지를 통하여 강력한 설득력으로 자기를 지속시켜 나아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악은 개인현상이 아니라 집단현상이 된다. 악의 집단현상은 일정한 제도의 틀을 가지고 분업을 통하여 효과적인 구조를 가지게 된다. 특별히 악이 철저하게 조직적인 모습으로 제도화되며 사회구조적인 성격을 띠고 반복될 때, 악은 드디어 “문화”가 된다.
  문화적인 차원 속에서의 악은 “관행”(routine)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이는 우리의 양심적 판단을 마비시킨다. 악에 대한 비판적 연구나 악에 대한 교정이 역사의 발전과정 속에서 너무도 더디게 진행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악에 대한 집단적 무의식 때문이다. 악은 문화와 제도의 외피로 위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죄의식 없이 재생산 된다.
  집단적인 죄는 도덕적 개인의 양심적 판단을 왜곡시키고 수많은 편견과 오류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에게 반사이익을 준다. 이는 영국에 노예제도가 도입될 당시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다가, 그것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이익에 영국의 양심이 굴복한 것과 같다. 양심적인 사람이 증가되어 다수의 사람이 이 악한 제도와 관행을 반대 하더라도, 민중의 두려움과 독재자의 횡포, 권위 있는 입법자의 용기부족으로 말미암아 이 같은 부정의가 한동안 유지되기도 한다.  

II. 구조악의 다중성(plurality)에 대한 해부

  1. 악한 제도
  구조악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 없이 사회 속에 악이 심겨질 수 없으며, 악인 없이 악한 구조가 생길 수 없다. 사람이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도록 전적으로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타락 이전에 인간에게 부여한 식욕, 성욕, 사회성, 심미적 능력, 지성 등의 여러 은사들이 소멸되지 아니하도록 배려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일반은총(common grace)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는 인간성의 특징 중에서 도구를 만들거나 제도를 만드는 인간의 합리성은 여전히 소실되지 않은 채로 있다. 심지어 사악하거나 잔인무도한 전제군주나 독재자라 하더라도 제도를 세우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 제도는 여러 사람의 분업을 가능하게 한 고급의 도구이다. 제도라는 도구는 반복적인 인간관계가 응고되어 나타난 실체이다.
  악한 지도자에게 있어서도 제도는 훌륭한 도구이다. 독재자가 늘 그러하듯이 그들은 자신의 의도를 합리적인 제도의 옷을 입혀 치장한다. 독재자는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축적되어 온 헌법적 틀과 사법당국, 행정관리 및 조직, 그리고 그러한 조직을 지지하는 물리적인 강제력을 장악한 경찰력과 군사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돕는 구조로 재편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독재자와 그 권력 장치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권력 장치는 독재자가 가진 의도와의 연장선상에 포진하게 된다. 평상적인 상황에서 사람을 돕거나 섬기기 위하여 조직되고 사용되는 도구는, 악한 지도자에 의하여 인간성의 파괴와 억압 및 소외를 장기화시키는 도구가 된다.

  2. 악한 영성.
  이때에 생겨나서 유지되는 권력구조나 사회제도는 영성(spirituality)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지도자는 제도의 수장이다. 한 공동체와 그 구성원을 대표하는 수장으로서 제도를 운영하는 지도자는 그 제도 내의 구성원의 생각과 판단을 무시하고 존속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유능한 지도자는 구성원의 사상적 기조를 조직하고 체계화시켜 영성을 주조하여 내거나 조작함으로 지지를 획득한다. 여기서 생겨난 제도를 움직이는 정신적 기조가 “제도의 혼”이 라고 부르는 제도 혹은 체제의 영성이다. 이러한 영성에 의존하여 구성원의 지지를 얻고 이러한 지지를 배경으로 구조와 제도를 장악한다. 그러므로 모든 조직의 뒤에는 그 조직을 이용하려는 자들의 의도와 가치관, 즉 영성이 숨어있다.  
  이러한 영성은 역사 속에서 종종 이데올로기로 드러났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체제나 자유주의 체제의 존재이유를 제시하며, 나름대로의 역사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제시한다. 이데올로기는 죄와 소외가 없는 사회의 초기 상태, 즉 “자연상태”(the state of nature)를 제시하며, 그 사회로부터 현재가 어떻게 일탈되었고, 결국에는 어떠한 개혁과 변화에 의하여 이상사회 즉, 유토피아(Utopia)에 이를 것인지를 설명한다. 이것은 종종 유사 종교의 형태를 띠면서, 한 체제내의 구성원을 평신도로 만들고 그 지도자를 세속적 메시야와 유토피아의 건설자로 만든다. 이데올로기는 그 결과 하나의 거룩한 신화(神話, myth)가 된다.
  막강한 권력자와 그를 지원하는 거짓선지자가 만나는 점이 바로 구조의 영성을 조작하여 내는 순간이다. 이 유사종교에 빠진 체제가 그 환상(illusion)에 빠져 있는 동안, 체제는 압도적인 신화로 주민을 지배한다. 이러한 구조악의 저변에는 이데올로기로 표현되는 타락한 영성의 문제가 항상 존재하고 있다.

  3. 악한 영
  악한 제도와 악한 영성의 이면에는 악한 영이 존재함으로 악의 삼중주(a trilogy of evil)를 이룬다. 악한 제도는 이데올로기라는 악한 영성을 가지며 이 왜곡된 영성의 저변은 신학적 인간론(theological anthropology)에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면이 도사리고 있다. 한 강력한 체제는 "그 구성원과 제도의 총화 이상"이라고 생각한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하인리히 슐리어(Heinrich Schlier), 리챠드 마우(Richard Mouw) 및 로버트 린티컴(Robert Linthicum) 등의 신학자들이 “정사와 권세”(principalities and powers)를 인간론의 영역뿐 아니라 천사론에 연결시키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제도와 국가의 배면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실체(supernatural reality)인 천사에 대하여 분명하게 주장한다. 성경의 전반에 나타난 사단, 특히 묵시적 문서인 다니엘서와 계시록이 체제의 배후에 존재하는 강력한 영에 대하여 지적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페르시아의 배면에서 은밀하게 역사하는 페르시아의 군주(君主, the prince of Persia, 단 10:13, 20-21), 예수를 죽이려했던 당시 지도자들의 배후에서 역사하던 타락한 유대인들의 아비 마귀(the devil, 요 8:38 이하)는 영적 전쟁의 가장 전략적인 부분을 보여주는 귀중한 가르침이다. 아울러 계시록 13장에서 짐승으로 표현된 적그리스도 국가와 거짓선지자에게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는 것은 용(the dragon)으로 표현된 사탄이다.
  그러므로 악한 영적 존재는 단지 인간을 미치게 하거나 선한 사람을 핍박하거나 병을 가져오며 지도자를 완악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제도의 영성에 관여하며, 제도의 운영과정에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한 국가의 문화와 문명, 그들의 가치관과 전통 및 관행을 경유하여 나타난 정책결정은 외견상 합리적인 모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차원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며 악령의 관여를 향하여 열려 있음을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III. 하나님의 대안으로서의 영적 전쟁

  1. 영적 전쟁의 의미
  구조악이 “악한 제도”와 “제도의 영성” 및 “악한 영”에 이르는 다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은 악에 대한 성도들의 응전 방법이 다차원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사회 속에서 구조악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은 단순히 제도 개혁운동에 그치지 않는다. 악한 제도의 개혁은 그 제도의 영성을 개혁하는 말씀선포와 교육을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조악에 대한 우리의 싸움이 단지 제도변혁 운동과 제도의 영성변화를 위한 선포의 차원에서 마칠 수 없는 것은 이 운동이 악령에 대한 영적 전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악에 대한 우리의 응전에서 가장 비가시적인 영역은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의 차원이다. 영적 전쟁은 체제의 영성을 교정하는 것과 나아가서 변화된 영성에 맞추어 체제를 구조적으로 개혁하는 것을 동시에 취급하여야 한다. 구조악의 가장 깊은 곳에 영적인 실체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이 영적 실체에 대한 싸움 없이 대부분의 의식화교육과 사회변혁운동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영적 전쟁의 차원은 기독교의 변혁운동이 사회적인 변혁운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심원한 영적 기반을 가진다는 면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눈으로 관측되는 우주라는 보이는 세계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로 구성된다. 신자들의 실천은 보이는 세계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특히 신자들이 투입된 이 세상에서의 씨름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엡 6:12)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영적인 세계에서 악령들에게 대항하는 것을 우리는 영적 전쟁이라고 말한다.

  2. 집단적 사로잡힘에 대한 대안  
  신약학자 월터 윙크(Walter Wink)는 사회적 변혁과 영적 전쟁의 관계를 그의 기념비적 삼부작(trilogy) 중 제 2편인 「영적 권세의 폭로」The Unmasking The Powers: The Invisible Forces That Determine Human Existence(1986)에서 설득력 있게 취급하고 있다. 그는 악령이 개인뿐 아니라 사회를 점거할 수 있다고 정확히 표현하였다. 윙크에 의하면, 악령에 의하여 사로잡힌 귀신들림에는 개인적 차원의 사로잡힘(personal possession)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집단이 악령에 의하여 점거된 집단적 사로잡힘(collective possession)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 차원의 귀신들림은 축사(exorcism)를 통하여 한 인격을 점거한 “영적 실체”를 축출하는 것으로 치유될 수 있다면, 집단적 사로잡힘이란 사회적 축사(social exorcism), 즉 한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집단적 영성과 정신병리현상을 교정하고 치유하는 것으로 달성된다. 이는 책임 있는 신자의 집단이 은밀하게 사회를 사로잡은 악령의 퇴치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체제를 사로잡고 그 인간성의 파괴를 조장한 타락한 제도의 영성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것이다.  
  나치당이 지배하는 독일에서 수많은 교회들이 독일 사회를 사로잡은 잘못된 영성과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단을 지속적으로 정죄하고 축출하는 기도와 예배를 드렸다면, 그들이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닉슨 대통령이 재선되어 임기를 시작하기 전날, 윌리암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는 로드 아일랜드의 1200명이 모인 초교파 집회에서 귀신축출을 위한 기도문을 읽으므로 메시지의 결론을 맺었다. 그 내용은 "닉슨을 마귀의 사로잡힘(demonic possession)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간구였다. 모든 청중은 일순간 충격으로 잠잠하여졌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그 축사(逐邪)를 위한 간구에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이는 정치적 타락의 순간에 악에 점거된 사람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교회의 첫 번째 책임이 목회적이면서도 영적인 배려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다.
  나중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회심하여 교도소 선교회의 창시자가 된 챨스 콜슨(Charles Colson)은 「거듭나기」Born Again라는 그의 자서전적 작품 속에서 감동 없이 음울했던 개표시간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있고 무엇인가 빠져 있는 퇴색된 닉슨 대통령 선거전의 승리의 사건은 불의로 쟁취한 권력의 그늘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건이 있고나서 얼마 못 되어 닉슨 정부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3. 사회적 축사(social exorcism)
  우리는 사실상 축사기도와 역사적인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실증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의 헤멧(Hemet)이라는 지역에서 생긴 지역사회를 위한 축사와 연이은 교회의 부흥, 플로리다 남단 “마(魔)의 삼각지대”의 선상에서 드린 예배와 재난의 사라짐, 그리고 차우체스크의 독재를 무너뜨린 작은 헝가리 개혁교회의 사악한 권세에 대한 폭로시위는 집단적 사로잡힘에 대한 폭로와 축사의 공적 예식이 좋은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여겨지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증적인 자료보다도 더 귀중한 사료가 있다. 그것은 성경의 한 중요한 사건이 사회적 축사의 놀라운 예시라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영적 전쟁이 한 체제의 악령을 축출하며 영성을 바꾸는 것임을 예증하고 있다. 체제의 영성을 퇴각시키고 악령의 역사를 통쾌하게 부순 영적 전쟁의 원형은 “출애굽 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에서의 10가지 재앙은 애굽이라는 체제의 영적 존재들에 대한 축출이다. 신으로 여겨온 나일 강에서부터 장자에 이르는 모든 우상을 징계하심으로 하나님은 당시에 총애되던 우상의 무능력을 폭로하셨다. 영적 전쟁의 승리는 4세기 이상 애굽의 신에 압도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영성을 바꾸었고, 여호와께서 참된 신이심을 분명히 보였을 뿐 아니라 그들은 사로잡았던 노예제도를 해체시켰다. 아울러 시내산 언약 사건은 새로운 영적 실재로서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주었고, 율법을 통한 새로운 영성을 수립하게 하여 히브리 사회체제를 구성하였다. 이는 사회적 축사를 통하여 나타난 세속에 대항하여 건설되어진 하나님의 대안사회였다.  

  4. 영적 전쟁의 무기인 기도
  출애굽에서 나타난 영적 전쟁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용사이신 하나님”(God the Warrior)으로 싸우시며, 사람의 역할은 하나님의 싸움에서 부수적인 도구로 사용 받는 것이다. 영적 전쟁에서의 기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이다. 다니엘의 기도는 영적 전쟁에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도구인가를 보여준다. 그의 기도를 통하여 영적 전쟁의 실재와 진행을 발견하게 된다. 다니엘을 향한 천사의 응답은 천상의 세력들과 체제의 배면에 있는 영적인 존재가 다니엘의 기도로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페르시아국 군이라는 타락한 천사는 다니엘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를 막고 있다. 21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는 다니엘에게 도착한 천사가 전한 메시지의 내용은 페르시아가 망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왜 페르시아라는 나라 배면의 천사가 그 메시지의 전달을 막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체제의 영성을 와해시킬 만한 폭로가 그 메시지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가장 강력한 영적 전쟁의 무기이다.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일하시며, 그의 부리시는 선한 천사는 정사와 권세와 능력으로 표현된 악령에게 대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은 타락한 체제의 영성이 어떻게 왜곡되었으며 과장되었는지, 그 체제가 얼마나 많은 불의를 행하면서 인간성을 타락시켰는지를 알게 하여준다. 우상의 헛됨에 대한 폭로는 결국 한 체제의 영성을 와해시키면서 이에 대한 대항체제로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한다. 출애굽 사건에서의 모세의 선포와 다니엘의 기도와 금식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활동하는 강력한 영적존재들에게 성도들이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보여주는 확실한 성경적 사례이다.

IV. 구조악을 바꾸는 교회의 방향전환

  1. 선지자적 영성 부재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8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종종 독재나 구조악에 대한 저항을 기독교인의 윤리적 파일에서 누락시켰다. 7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던 교회는 구교와 함께 소수의 개신교 지도자와 평신도들이었다.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교회는 제도의 배후에 숨어있는 잘못된 이데올로기와 영성,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역사하는 악한 영의 미혹을 간과하고 그것을 기독교적 선포의 내용에서 삭제하는 경향이 많았다. 더구나 구조악과 그 책임자들에 대하여 폭로하는 것은 차치하고, 구조악을 대항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에서 조차 도피하는 우를 범하였다.
  일제하에서는 사회적으로 소수인 개신교도는 사회적 책임을 각성하고 민족사의 고난에 동참하는 빛나는 업적을 가졌다. 해방 이후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어는 정도 사회적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교회의 부흥을 이루었던 것은 이러한 역사적 공헌의 열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사회의 구조적인 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교회는 점점 사회에서 접촉점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사회적 적실성과 사회적 책임을 도외시한 지난 30년의 결과로 우리는 현재 사회의 지도력을 세속주의자들에게 내어 주고 말았다. 일제시대에 전적으로 무력하였던 구교는 제 2차 바티칸 회의를 기점으로 하여 사회참여를 위해 투자한 한 세대 후에, 교세성장과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라는 열매를 먹고 있다.
  작금의 한국정치의 후진성과 이데올로기적 편향은 적어도 교회가 “체제”(system)에 대한 선지자적 가르침에서 도피한 것으로 말미암은 귀결이다. 교회가 개인적인 경건과 교회내적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에 몰입하는 동안 정치, 사회 및 경제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이는 교회가 “공공의 영역에서의 바벨론 포로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독교 사회윤리는 퇴조하고 신앙은 공공의 영역과 사회의 구조적 재편성에 별반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2. 사회적 영성 개발의 필요성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내적 지성은 물론이지만, 사회 상황 속에서의 제자도를 실천하는 모델을 발견하는 것이 시급하게 되었다. 기독교 실업인의 존재도 중요하지만, 경제활동을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지어서 실천하는 경제 영역의 제자가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정치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인도 좋으나, 정치사회적인 면에 있어서의 정치적 제자도와 세계관을 겸비한 지도자는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뿐 아니라 보이는 사회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면,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다양한 사회영역은 기독교적 묵상과 신앙적 실천의 영역에서 결코 제외되어서는 아니된다.
  한 세대 이후, 한국 사회를 지도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도자 집단이 한국 교회를 통하여 배출되어야 한다면 이는 단순한 환상이라고 논박하여야 하는가?  한 시대를 풍미하던 군부 엘리뜨의 시대가 지나고, 이에 대항하던 민주투사들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80년대의 운동권세대들의 사회의 전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때를 맞이하고 있다. 이제 대학에서 이미 퇴조한 운동권의 공백을 메우며 차세대의 지도적 집단을 길러내는 일은 한국교회의 몫이어야 한다. 전통적인 교리 교육만이 아닌 기독교 세계관의 교육, 교회내적 제자도만이 아닌 각 영역에서의 기독교인의 사회적 제자도의 실현, 경건주의적 영성만이 아닌 사회적 영성함양이라는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교회의 교육투자와 사회에서의 실천적 참여가 없이는 지금부터 30년 이후의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 운동의 일환으로 이끌어 내가가 쉽지 않을 것이다.  
  청교도의 사회적 영성(social spirituality)이 영국을 개혁하고 미국을 세웠듯이, 종교개혁 정신이 스코틀랜드를 개혁하고 화란의 독립혁명에 영향을 미쳤듯이, 최초의 개신교 전통 속에 아로새겨진 사회적 영성, 정치적 영성의 진작은 우리사회의 구조악을 최소화하고 정의를 진작시키는 사회적 대안으로 진지하게 연구되고 실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V. 맺음말

  신앙운동을 교회로 한정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신자들의 활동을 교회사적인 운동으로만 한정시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광대하심을 제한하는 것이다. 신앙운동은 교회사적인 운동에서 민족사적인 운동으로 고양되지 않으면 사회를 향한 기독교인의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다.
  신자의 영향력이 사회의 전역에 영향력을 미치던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의 황금시대에 기독교 지성은 시대의 대표적 지성이었으며, 그들은 신학적 영역을 뛰어넘어 모든 영역을 거론하는 세계관적 지성이었다. 그때 기독교 문화는 사회의 영성과 영적 기류를 인도하였고, 압도적인 학문적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선한 의미의 "사회적 주도권"(social hegemony)을 가지고 있었다.
  시대의 악화가 계속 진행되리라는 선지자적 비관주의(prophetic pessimism)에 빠져 수세적인 기독교로 만족하기에 한국 교회는 너무도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교세의 확장과 세계 2위에 해당하는 선교사의 파송, 지속적인 사회의 변혁과 각종 영역의 분화, 시민사회의 성장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의식에 대한 개안, 그리고 세계관적 지성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사회윤리의 필요성에 대한 절감은 교회 자체의 변혁은 물론 사회적 영성의 제고라는 관점에서 좋은 징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욱이 암울한 묵시(apocalypse)의 시대에서도 다니엘과 같은 소수의 신자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라면, 이 시대에도 남은 자를 통하여 정의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새로운 사회를 도모하는 것이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의 성역을 흘러 넘쳐 모든 세속을 변화시키며 채우게 될 사회에 대한 묵상과 기도는 이루기 어려운 환상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글은 2004년 9월 "목회와 신학"이란 잡지의 청탁에 의하여 쓰여진 특집의 일부분입니다.사랑하는 성도님과 특별히 코리안-아메리칸의 자존심(^^) Jupiter선생님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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