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모 교수의 힐링 메시지] 고난의 터널에서 은총의 노래를 부르자 > 묵상/기도 | KCM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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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준모 교수의 힐링 메시지] 고난의 터널에서 은총의 노래를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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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형색색의 고난의 터널을 만나는 인생들


    지난 2주간 손녀딸들과 함께 미국 남부를 여행했다. 콜로라고 주, 뉴멕시코 주, 텍사스 주, 그리고 워싱톤 주까지 상당한 거리를 비행기와 자동차로 다녀왔다. 미국 남쪽은 화씨 100도(섭씨 38도)가 넘어 “할아버지, 나 숨 막혀 죽겠어?” 할 정도로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한 여름 무더위 속에 사막 지역을 여행하면서 필자가 살고 있는 콜로라도 주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장소인지 새삼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한낮에는 섭씨 35도가 넘어가는 무더위가 시작되는 지금도, 필자가 살고 있는 동네의 파잌스 픽(Pike Peak) 로키산 정상은(14,115ft, 4,302M)에는 아직도 음지에는 눈으로 덮여 있다. 산 정상까지는 자동차로 약 1시간 이상, 산 구비 구비를 운전해 올라가야 한다. 고비를 돌 때마다 산 아래를 바라볼 때, 고소 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운전하기 매우 힘든 코스이다. 특히, 정상에 올랐을 때는 산소 부족 현상으로 호흡조차 힘들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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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키산


    인생을 살다 보면, 높은 계곡을 올라갈 때도 있고, 깊은 터널을 빠져나가야 할 곳도 수없이 많다. 지금까지 아니 지금도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도 예외없이 제각기 자기 인생의 삶 속에 각자 다른 깊은 인생의 터널 속에 갇혀 있는 것을 본다.


    얼마 전 집수리를 해 준 독실한 기독 신자 기술자를 만났다. 그는 에스키모인 아내와 40년 이상을 살고 있는데 그의 아내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그는 질환을 앓고 있는 아내를 돌보는 것이 그의 인생의 터널이었다. 또한 집안 카페트 샴프를 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성실한 그리스도이요, 교회에서 드림을 치는 예배의 헌신자이다. 그런데 그의 여자 친구는 그와 함께 오랫동안 교제하고 지냈으나 그녀가 도박, 마약, 담배 등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머리를 깎아 주는 이발사는 71세인데, 안타깝게도 서로가 성격이 맞지 않아 노년 이혼을 하고 혼자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 교회 성도님 한 분은 한국에 있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신천지에 포섭되어 가정적으로 깊은 고뇌와 아픔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또한 우리 교회에서 협력하고 있는 외국 근로자 선교에 힘쓰시는 어떤 목사님은 깊은 우울증에 빠져 사모님이 간호하기에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또한 전 목회자의 헌신적 삶을 살았던 권사님은 자식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한평생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 여자가 낳은 아들을 친자처럼 뒷바라지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살아갔던 그분의 임종 소식을 들은 적도 있다.


    나는 어떠하며, 독자 여러분은 어떠한가, 우리는 각자가 지나갈 인생의 터널, 눈물과 한숨, 고뇌와 아픔 속에서 인생의 깊은 터널을 지나가고 있지 않을까?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인생에게 이런 아픔과 고난의 터널을 주시는 것일까? 고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라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고난 자체보다 고난을 이끌어가는 하나님께서 대한 의문, 그 대답이 더욱 우리를 더욱 힘들게 만들 때가 많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는 자신의 기대와 달리 막다른 인생의 깊은 고난의 터널과 가시밭길을 만날 때가 많다. 더우기 어렵게, 힘들게 그렇게도 긴 터널을 빠져나가갈 무렵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길고도 긴 터널 입구에 와 있는 때도 많다.


    너무나 긴박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매몰차게 몰아닥친 현실의 어려움을 그 누구에게 호소할 수도 없고 도움을 요청하려 하지만 무슨 뾰족한 방도가 없어 주저 앉을 때가 허다하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 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려는 성도들도 갑자기 만나는 환란과 역경의 소용돌이 속에서 매우 당황하고 신앙적 회의와 번민에 빠지는 혼란이 가중도리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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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족장들의 삶의 공통점은 고난의 긴 터널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족장들도, 교회사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도 예외 없이 긴 터널을 삶의 현장에서 만나 씨름했던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제 아무리 긴 터널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끝이 있다” 것도 또한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이요, 진리이다. 단지 그 터널을 빠져나가는 시간에서 하나님의 시간과 나의 시간, 하나님의 뜻과 나의 생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지금 “곧” 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신다는 시간의 차이와 왜 이렇게 될수 밖에 없을까에 대한 목적과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좀 더 부연하여 설명을 하지면, 원하지 않는 깊고,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신령한 영적 교훈들이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터널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반드시 같지만은 않음을 철저히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의도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든 우리의 인생 터널은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숨어있고 의도되고,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라야만 비로소 터널은 끝이 보일 것이다.


    우리의 생각에 너무나 답답하고 한시바삐 이 좌우를 분별하기 힘든 어둠의 긴 터널로부터 도망치기 원하는 촉박한 마음이 생길 때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나를 부르라”(사55:6)는 말씀이 이정표처럼 우리 맘속을 비추워야 한다. 매 순간 고통이라고 느껴질 때라도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때를 바라봐야 할 때에 바라보고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또 내 생각에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저렇게 되기를 소망할 때,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고 놀라운 생각 앞에 우리의 좁고 조급하고 답답하고 연약한 생각들을 접어 둘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미칠 수 없는 깊고 오묘하신 생각과 목적을 가지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인생의 생각보다 훨씬 높고 훨씬 더 위대하며 훨씬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우리가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선한 경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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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사로의 죽음에 보여준 하나님의 심오한 시간과 계획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나사로의 누이들을 보아서라도 당장에 달려 가셔서 고쳐 주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나사로의 누이들의 생각이요 또한 우리들의 생각이다. 나사로의 병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조처하고 나아가서 나사로를 살렸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적 관념이요, 우리들의 판단 기준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식을 접하시고도 그 슬픔과 아픔의 장소로 곧장 달려가시지 않으셨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전갈을 들으신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지금 당장에 가실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슬픔에 잠겨 있고 오빠의 생명은 사그러져 가고 있는 순간이 아니었던가? 절대 절명의 순간, 인간적 능력의 한계에 도달한 마지막 절규의 기도를 해야 하는 순간. 그러나 그들의 결정적인 시간과 예수님의 때는 정말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다. 예수님의 때와 생각은 도대체 무엇이며 언제인가? 우리는 살릴 때를 바라는 것이요,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의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그 죽음의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일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놀랍고도 신기하며 오묘한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깨닫는다.


    여기에 인간의 낮은 생각과 하나님의 높은 생각을 조금이나마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깊은 생각을 마리아가 생각할 수 없었듯이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일들이 우리의 현실에는 산재해 있다. 마리아가 후에 오빠의 부활을 목격하기 전까지 전후사를 예수님이 미리 설명하셨더라도 이해할 수가 없었듯이 오늘 우리의 고난과 고통이 왜 존재하며 왜 감수해야만 되는지를 결국 마리아가 훗날 이해하게 되었듯이 우리도 그 시간까지 인간적 항변이나 신앙적 회의를 극복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때를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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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터널과 고난에 대한 하나님과 인간의 상이한 차이


    우리는 살아오면서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너무 달랐음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나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너무나 달랐음도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특히 우리의 선택, 우리의 태도 결정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의 결혼 문제, 가정 문제, 직장, 교회 생활, 우리의 인간관계, 우리의 사업 문제 등등 일련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는 다른 나만의 생각의 길을 선택했다가 좌절한 수많은 경우를 가지고 있다. 참 하나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그 계획으로부터 과정 결과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구나를 느끼게 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가시밭 길, 십자가 길, 고통과 역경의 길, 가파른 내리막 길, 거치른 오르막 길 속에 우리를 던져 놓으셔서 우리의 생각을 고치시고 우리의 길을 수정하시고 우리의 안목을 새롭게 해 준 사실을 이미 지난 날 우리 인생을 돌이켜볼 때 잘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지난 삶 속에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 하나님의 길과 나의 길이 달랐음을 속히 기억해 내고 지금 우리가 당면한 인생의 문제도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전혀 다를 수가 있다는 결론을 빨리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이 이루어 질 때까지 주의 뜻만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기를 진정 바란다.


    얼마 전에 짐 정리를 하다 보니 신대원 다니던 시절에 읽었던 책이 발견되었다. 그 책의 저자는 50대 한참 일할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80년 한국 교회에 그나마 영향력을 미치셨던 서울 새문안 교회 김동익 목사님께서 쓰신 설교집 중에 제목이 [고통 때문에 잘 된 이야기]라는 책이 있다. 또한 부족한 저를 친 동생처럼 아껴 주셨던 고 옥한흠 목사님의 고통에 관한 여러 책이 보였다. 정말 두분 목사님의 책 제목과 주제처럼 “고통은 변장된 축복”, “고통 때문에 잘 된 이야기들” 잠시 흩어 볼 수 있었다.


    모든 성도들이 알다시피, 인생의 긴 터널 속에 살아간 인물을 한명 꼽으라면 당연히 고난의 대명사인 욥일 것이다. 고난의 대명사의 롤 모델인 욥은 정말 처절한 인생의 고통의 터널 속에서 절실하게 하나님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달랐음을 증언하고 있는 자이다. 더욱이 욥은 고난의 터널과 잿더미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증인이요 자신의 보(증)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값진 인생 경험을 통해 신앙 간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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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널 안의 욥과 터널 밖의 욥에 보여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터널 밖의 욥은 어떤 자였는가? 고난을 당하기 전 행복의 꽃받에서 살았던 욥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동방 우스 땅에서 가장 큰 자였다. 여기서 크다는 말은 왕가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숫자적으로 크고 규모나 내용적인 면에서도 크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는 큰 명성을 가진 자였다. 그는 또한 물질적으로 대단한 부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많은 자녀를 두어 더할 나위없는 풍성함의 대가였을 것이다. 자녀들은 동기간에 화목하고 신앙생활까지도 잘해서 매우 모범적이고 존경스러운 부러움의 대상인 가정이었던 것이다.


    반면 고난의 깊은 터널 속에서 욥의 현실은 어떠했는가? 욥에게 불어 닥친 폭풍과 깊은 터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욥에게 여섯 종류의 환란과 고통이 순식간에 한꺼번에 몰아쳤다. 하늘의 불, 태풍, 이방인의 침략으로 절단이 나고 모든 소유는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7,000마리의 양, 3,000마리의 약대, 500겨리의 소와 10명의 아들 딸, 수많은 종들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더구나 자신의 몸에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온 몸에 고름이 나는 악창에 걸려 잿더미 속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 설상가상으로 평소에 자신을 사랑하던 아내마저 마음에 가시가 되었으며, 친구들은 열 번이나 욥을 꾸짖고 조롱하고 학대하였다.


    욥의 형제들도 그의 곁을 떠났으며 욥이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도 외인처럼 되어 버렸다. 돈 있을 때 아첨하던 친척들도 떠나 버렸다. 굽실거리며 수종들던 종들도 본체만체 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자신과 살을 나누던 아내마저도 고통의 숨소리조차 싫어하고 저주했다. 한 때 욥의 영광을 거울로 삼았던 동네의 아이들마저도 그를 업신여겼다. 가까운 친구들, 그를 사랑 했다던 친구들도 그의 대적자가 되었다(욥19:19). 욥의 피부와 살은 뼈에 붙어 버렸고 남은 것은 이 꺼풀뿐이라고 토로하였지 않았던가?(욥19:20).


    결국은 터널 속에서의 드리는 아름다운 고백


    욥기 1장 20절에 욥은 일어났다고 되어있다. 갑작스런 재난에 그는 쉽게 기절, 좌절, 포기, 절망의 탄성을 발하지 않았다. 기막힌 비보 속에서 의연히 일어났다. 절대 절망 속에서 일어났다. 1장 20절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었다고 되어 있다. 옷을 찢은 것은 심한 아픔과 슬픔을 뜻한다. 그가 인생으로 견딜 수 없었던 아픔의 표현이다. 또한 머리털을 밀었다고 되어 있다. 자기 죄에 대한 회개의 표시이다. 환란날에 자기를 살피는 겸손과 자기를 낮추는 회개의 모습이다. 엎드려 경배 하였다고 했다. 순경과 역경에 관계없이 하나님에 대한 자기 본연으로 돌아간 신앙인의 모습이다.


    그는 1장 21절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 지라.“ "인생이 본래 벗은 몸, 아무 것도 가지고 온것이 없지 않은가? 아무리 다 망했다고 할 지라도 결국 본래의 나의 상태로 가는 것뿐이 아닌가 라는 적신 신앙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21절에 "주신 자도 여호와 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 시니" 욥에게는 아무런 피해 의식이 없었다. 아무리 오고 가도 아직 본래의 인생 본전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 21절에 “여호와의 이름을 일컬어 찬송 받으실 지어다”.라고 했다. 당연한 귀결이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어려운 고백인가? 도무지 어떤 상황인가? 결단코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욥은 이처럼 수준있는 믿음과 신앙을 통한 전천후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욥은 자기에게 임한 환란의 태풍과 긴 터널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목적과 간섭과 섭리의 산물임을 알았다. 욥은 환란과 고통의 연속인 비바람도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대로 하나님의 결재를 받은 후에 온다는 것을 알았고, 아무리 격한 상황이 전개될 지라도 성도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욥은 하나님의 결재 하에 오는 인생의 고통은 바로 신앙의 성화와 성숙을 보장하는 보증 수표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환란을 당하여 긴 터널을 들어설 때, 환란과 터널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더 중요시 여기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이런 잿더미 속에서 찾으시는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일까?” 등을 깊이 마음에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더 중요시하고 하나님이 더 귀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①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생각이시다. ②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보시겠다는 생각이시다. ③ 우리들을 이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시려는 생각이시다. ④ 우리 상황을 끝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데까지 이끄시겠다는 생각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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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널 속에서도 드린 욥의 허심탄회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


    욥기 16장 19절 말씀에 욥은 "하나님은 나의 증인 이시요 나의 보(증)인 이시다"라는 너무나 값진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첫째로, 보호자 되신 하나님이시다.


    시편 11편1절에 보면 환란을 당할 때 반응을 보이는 두 종류의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한 부류의 사람은 놀라서 산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있고 다른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 생각이 없는 놀란 새들은 당황하면 우르르 산으로 도망을 간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께로 피한다. 욥은 환란을 만났을 때 새들처럼 산으로 혹은 인간의 방법으로 도피처를 찾지 않았다. 그는 그의 증인이요 보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증인과 보인이 되시되 성경을 통하면 신명기 32장 9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자기 눈동자와 같이 지키 셨도다”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시되 눈동자 같이 보호하신다는 매우 실감 있는 표현을 하고 있다. 눈은 신체의 귀중한 부분이다. 눈이 어두우면 온몸이 어둡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귀중한 눈을 보호하기 위하여 두개골에 큰 굴을 파서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보증하시기를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둘째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에서 우리 인생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독수리에 비유하고 있다. 독수리는 높은 절벽이나 깍아지른 벼랑 위에 둥지를 만들고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에 보금자리를 꾸려 부드러운 털로 새끼를 보호한다. 그곳에서 부화한 새끼들은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안전하게 성장한다. 어린 새끼들은 언제 까지나 평화로운 가운데 안일한 시간들만 있을 줄 알고 있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어미가 날개를 펄럭 거리며 둥지에 깔려 있던 부드러운 털을 다 날려 버리고 둥지를 뒤흔들어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쏟아 버린다. 갑자기 뜻밖의 소동을 당한 새끼들은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서 비명을 지른다. 그 높은 벼랑으로부터 추락 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위해 날개를 퍼덕이는 것이다. 그러나 어미 새는 새끼들이 아직도 힘이 남아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마침내 새끼들의 온몸으로 부터 힘이 다 빠져나가고 공중으로 그냥 떨어져 내리는 순간 어미 새는 쏜살같이 내려가 새끼를 자신의 날개로 받아 안전하게 보호 하는 것이다.


    얼마나 잘 맞아 떨어지는 비유인지. 우리가 아직도 버틸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마냥 지켜만 보시는 하나님이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흔들어 놓은 손으로 받아 주시는 손, 그 손이 바로 하나님의 손이라는 기막힌 사실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때로 욥같이 너무나 어려운 고통과 재난과 역경을 당할 때가 있다. 이 때야 말로 하나님이 나의 보증이 되시고 나의 보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실까?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이런 역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놀라운 섭리가 있음을 철저히 인식하라.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할까? 왜 이렇게 마음이 답답할까? 왜 이렇게 잠이 오지 않을까? 왜 이렇게 조급하여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을까? 여러분의 보금자리가 어지럽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도약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고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자리에 정체하고 마냥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자리를 흔드실 때가 반드시 있다. 그러나 흔들어 놓으시고도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있음을 보증하신다. 보다 성숙되고 보다 성화된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셋째로, 보증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을 보증 삼고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보증 삼고 사는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을 보증하고 살았던 사람이다. 욥의 말년에 그는 잿더미의 그 지긋지긋한 인생의 긴 터널을 빠져 나와 광명의 빛을 보는 놀라운 축복을 욥기서 마지막 장에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싸매임을 받고 고침을 받고 살리심을 받았다. 그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그의 재산은 전 보다 갑절이나 더하게 되었다. 새로 태어난 자녀가 10남매나 되었다. 완전한 회복, 완전한 축복을 받았다. 그것은 욥이 전천후의 신앙, 적신 신앙, 절대 신앙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보증과 보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를 잘 알고 있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는 모든 사람에게 기억되는 명작이다. 그러나 그는 자는 자신만을 의지하고 살아간 사람이다. 그는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불행한 인생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그는 참 좋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당시 세계적인 부흥사 였던 무디 선생과 매우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와 선교사의 꿈을 버리지 못했던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자녀를 철저히 신앙으로 교육시켰다. 주일학교 당시 헤밍웨이는 성가대에서 찬양을 불렀고 신앙생활을 아주 잘 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성인이 되면서 신앙을 이탈했고 점점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는 문학가로서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타락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는 어머니의 타이름을 잘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마음이 강팍해지고 그의 영혼은 매우 곤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을 전원이 없어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 같이 외롭게 살고 있다.”라고 고뇌하며 스스로 목숨을 버려 인생의 잿더미 속으로 침잠해 버렸다.


    그러나 세계적인 상담자 폴 투르니에는 아내를 사별하고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였다. “나는 슬픕니다. 그러나 나는 아주 행복합니다. 아내가 있을 때 나는 날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을 거르는 때도 있었지만 아내가 떠난 다음에 내 마음에 빈 공간이 생기자 나는 매일 같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눕니다. 그래서 내 마음은 행복합니다.”그는 인생의 잿더미와 같은 순간에 하나님을 자신의 위로자로 살았다는 간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의회 목사로 유명한 목사였던, 캐더린 마샬 이라는 분이 있다. 그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잃고 인생의 잿더미 속에서 캐더린은 이런 의미있는 고백을 하였다. “한 때 나는 남편이 없이는 인생을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깊은 만족과 더불어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가장 고통스러울 때에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캐더린은 사랑하는 남편이 떠나고 마음에 큰 고통만이 남았을 때 그 자리를 채우는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발견한 후 참으로 주님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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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을 맺으며


    결론적으로 지금 혹시 욥처럼 지독한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자, 독자 여러분이 될 수 있다. 고통의 긴 터널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신령한 영적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정말 가치있는 손실이다. 세상 사람들을 통해 위로 받으려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려야 한다. 궁극적 도움도 될 수 없고, 신앙의 최선의 원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흔들어 놓으신 그 주권적 섭리의 손으로 새롭게 하실 때만 터널의 출구가 보이게 된다.


    인생의 깊은 터널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불평, 불만을 쏟아 놓거나, 자기 혐오감과 자기 비하의 심리적 수렁이에 빠져서는 안된다. 더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해서는 더더욱 삼가 해야 한다. 오직, 주님의 선하신 때를 바라보고 인내하여 긴 터널 속에서 영적인 심호흡을 하여야 할 것이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NIV 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고백하며, 십자가 그늘 앞에 엎드리길 소망한다. 그리고 위로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갈망하길 소망한다. 특별히, 이곳에 새롭게 정착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선교사님 가정에 하나님께서 임마누엘로 동행하시길 기도드린다. 그리고 이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들이 혹시나 이 시대에 내가 욥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고뇌의 비바람 속에서 두렵고 떨리는 삶에 비록 거한다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여러분들을 넉넉히 지켜 주시므로 욥기 42장 12절의 복이 임하시길 것은 소망한다. 설령,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박국 3장 19절을 노래할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특별히, 팬더믹 이후, 고물가, 고환율, 고금리 속에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이 욥의 말년에 만난 놀라운 복들이 임하며 하나님의 오묘하신 주권과 섭리를 찬양하는 성숙된 성도들이 되시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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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정준모목사


    정준모 목사는 선교신학박사(D.Miss)와 철학박사(Ph. D)이다. 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CTS 기독교 텔레비전 공동대표이사, GMS 총재, 총신대학교 개방, 교육 재단이사, 백석대학교대신대학교 교수 역임, GMS(세계선교이사회) 총재 등을 역임했다.


    현재로는 현 GSM(선한목자 선교회) 고문, 콜로라도 말씀제일교회 담임, 국제개혁신학대학교 박사원 교수, 국제 성경통독아카데미 대표, 콜로라도 타임즈, 뉴스파워, 좋은신문, KCMUSA 칼럼리스트, 대표 저서, ≪칼빈의 교리교육론》, ≪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 《장로교 정체성》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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