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철의 에피포도엽서] 그 사랑의 깊이 by 박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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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의 깊이 by 박상임 (효사랑시니어대학)
스물여섯 살이었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직장에서 돌아온 내 눈에 쌀 한 포대가 놓여 있었다. 아마 5킬로그램쯤 되었을까. 단칸방 옆방에 함께 살던 주인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시어머니께서 놓고 가셨어요.” 1970년. 그때는 무엇 하나 넉넉한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가난한 집 막내에게 시집와 하루하루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던 막내며느리에게, 시어머니께서 건네신 사랑의 표현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남기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허리가 굽으신 어머니가 그 쌀을 들고, 혹은 힘겹게 이고, 우리 집까지 걸어오셨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며느리에게 쌀 한 포대를 놓아두고 돌아가시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기쁘셨을까. 그때는 몰랐다. 그 쌀이 단순한 양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안에는 “내 막내며느리가 굶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는 것을.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 한쪽에 고마움의 전율이 남는다.
또 어느 날이었다. 나는 감기 몸살을 아주 살짝 앓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어머니가 고운 빛깔의 살구 서너 개를 들고 찾아오셨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내 앞에 살구를 조용히 놓아두고 웃음 한 번 지어 보이셨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셨다. 아마 막내며느리의 얼굴빛이 어떤지, 몸은 괜찮은지 궁금해서 오셨을 것이다. 그러나 묻지 않으셨다. 살구 몇 개를 놓아두는 것으로 당신의 마음을 다 전하셨던 것이다.
돌아가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마 서너 개의 버스 정류장을 걸어가셨을 것이다. 그때는 버스를 타는 것보다 걷는 것이 익숙했을지도 모른다.
연세가 많으셨던 할머니 권사님은 막내 손자의 아기를 기다리셨다. 손자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어린 손주가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할머니에게는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세 살 된 막내 손주는 손을 많이 떠시는 할머니와 지팡이를 짚고 계시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나 커서 의사 되면 할머니 업어 주고 손도 고쳐줄 거야.” 얼마나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약속이었을까. 그때는 그저 어린아이의 귀여운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는 평생 간직하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흘렀다. 할머니는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린 손주는 어느덧 자라 자신의 길을 걸어 가고 있다. 어쩌면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할머니는 그날의 어린 손주를 바라보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의사 면허를 손에 든 손주를 보며 환하게 웃고 계시지 않을까. “그래, 네가 정말 의사가 되었구나.” 그 곁에서 주님도 함께 웃으시며 말씀하실 것 같다. “네가 어릴 때 할머니에게 했던 그 약속, 내가 기억하고 있었단다.”
생각해 보면 사랑은 참 이상하다. 쌀 5킬로그램에도 사랑이 담기고, 살구 서너 개에도 사랑이 담긴다. 어린아이의 철없는 약속에도 사랑이 담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우리는 그 작은 사랑들을 하나씩 꺼내어 가슴에 품는다. 그때는 미처 몰랐던 사랑이 세월이 흐른 뒤 우리의 마음속에서 다시 꽃을 피운다. 사랑은 말없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그 사랑의 깊이를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이다.

백승철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 <Oral Roberts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 캘리포니아 부에나 파크 (Buena Park)에 위치한 <사모하는교회 Epipodo Christian Church>의 담임목회자이며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이다. 199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에피포도예술과문학(Epipodo Art & Literature)의 설립자이며 대표이다. 다양한 장르의 출판(영어, 한국어)된 저서로 31권 외, 다수가 있다. 에피포도(Epipodo)는 헬라어로 “사랑하다. 사모하다. 그리워하다”의 뜻이다. usae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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