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용환의 예술묵상] 앙소르의 “그리스도의 부뤼셀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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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s Entry into Brussels in 1889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1888, 제임스 앙소르
게티 미술관(LA, CA)
이 작품은 화랑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인자는 고향에서 머리 둘 데 없다는 예수님 말씀처럼 미술계에서는 위대한 화가는 당대에 작품 걸 데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가 제임스 앙소르는 지금은 100프랑짜리 벨기에 지폐에도 얼굴이 나오는 위대한 인물이 됐지만, 시대를 앞서간 천재 작가들이 주로 경험하는 따돌림의 아픔을 작품으로 녹여내야 했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작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집과 아뜰리에에 걸린 채 그의 작품세계에 영감을 주는 역할로 1차적인, 그리고 위대한 사명을 다 했습니다.
작년에 동문들과 게티미술관에 방문했을 때 우리 목회자 일행은 이 거대한 작품 (가로로 5미터 가량) 앞에서 일제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작품이 주는 중층적인 메시지, 중앙에 계시지만 의미상 소외된 그리스도가 꼭 우리 시대에 오신 예수님 같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끄는 퍼즐같은 그림? 구조의 비밀을 찾아내야 할 듯한 압도감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입니다. 어쩌면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통하는” 류의 작품일지 모르겠습니다.
중앙 하단부터 봅시다. 군중들은 일제히 앞으로 몰려갑니다. 화면이 앞으로 쏟아져 내릴 듯 밀려듭니다. 가만 보니 얼굴들이 특이합니다. 표정이 과장돼 있습니다. 혹자는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가면을 안쓴 얼굴도 마치 가면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감추고자 써 버릇한 가면이 얼굴이 돼버린 신세일지도 모르지요.
작품 정 중앙에는 마칭 밴드가 군중들의 뒤를 잇고 있습니다. 마칭 밴드 앞에서 얼굴을 하늘까지 쳐 든 채로 무리를 이끄는 주교와 고관 대작들 얼굴이 죄다 가면 투성이입니다. 밴드가 앞장서고 그 뒤로 주인공이 나오는 형세가 돼야 할 텐데, 정작 밴드 뒤에 단독샷으로 등장하시는 예수님 주변은 썰렁합니다. 130년 전의 작품인데 꼭 오늘날 교회를 보고 누군가 그린 만평처럼 보입니다. 원로 목사, 공로 목사, 협동 목사, 수석 장로, 명예 장로, 은퇴 장로 등등 VIP들이 줄줄이 찬양받으시기 합당하신 예수님을 가로막습니다.
우리가 생각한 예수님의 입성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매우 중요한 높으신 분들이 떼지어 앞장 서니 예수, 그대는 우리를 따라오라는 형국입니다. 브뤼셀에 왔으면 부뤼셀 법을 따르고, 1889년에 왔으면 시대 정신을 따르라고 다그칩니다. 작품 상단을 가르는 붉은 현수막을 보십시오. VIVE LA SOCIALE, 사회주의 만세. 1889년에 메시아란 “사회주의자”라고 누가 규정했을까요? 주인공보다 앞서간 지성인, VIP 가면 그룹입니다. 작가는 그들의 시대정신을 조소했기에 20인의 젊은 진보그룹 “Les XX”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기득권 보수세력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요.
오른 쪽 구석에 조용히 걸려있는 작은 현수막에는 VIVE JESUS ROI DE BRUXLLES 예수 만세, 브뤼셀의 왕이라 적혀 있습니다. 어디에 걸린 지도 모르는 현수막, 마치 예수와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자칭”을 넣느니 마느니 옥신각신 하며 십자가에 걸었던 명패, <유대인의 왕>이 떠오릅니다.
이 화려하고 복잡한 퍼레이드를 한참을 둘러봐야 비로소 나귀 타고 홀로 터벅터벅 걸으시는 예수님이 보입니다. 무리를 이끄는 존재가 아닌, 그저 구원의 서사를 완성하고자 십자가에서 영광 받으시려는 고독 그 자체입니다. 이 포인트가 바로 작가가 의도한 하이라이트, 곧 복음의 역설입니다. 군중에게 외면당하고 화면 외진 곳에 희미하게 보이는 그곳, 바로 예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셨던 자리입니다. 십자가의 자리, 예루살렘 성문 밖 베다니, 시각장애인이 구걸하는 성전 문 앞과 병자들이 신음하며 모인 베데스다. 예수께서는 한 번도 군중들에 휩싸여 환호받고 싶으신 적이 없습니다. 시대정신의 기수로 지구를 구하는 히어로 되고 싶으신 적이 없습니다.
입성의 순간조차 외면당하시는 예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감정은 무엇일까요? 연민? 아닙니다. 용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소외와 함께 하겠다는 용기, 닭이 세 번 울어도 대답은 변치 않겠다는 용기, 그와 함께 죽고 다시 살겠다는 용기. 시대는 언제나 그럴 듯 한 구호로 현혹합니다. 그 구호의 끝자락은 누군가의 욕망과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 특정 지식인의 필요에 따라 구색 맞추는 분이 아닙니다. 부활의 아침을 향한 이 행렬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소외 그 자체로 존재하시는 예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와 함께 할 용기가 있느냐?”
묵상을 돕는 질문
• 나는 지금 예수님을 앞세우고 있나요, 아니면 내 구호와 내 가면을 앞세운 채 예수님께 따라오시라고 하고 있지는 않나요?
• 군중의 환호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예수님 곁에 머물 용기가 내게 있나요? 닭이 세 번 울어도 변치 않겠다고 오늘 다시 고백할 수 있나요?
손 모아 기도합시다.
주님, 화려한 구호와 가면들 사이에서 언제나 조용히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제 눈이 먼저 찾게 하소서. 군중의 박수가 아닌, 주님과 함께하는 그 고독한 자리에 기꺼이 서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술 묵상 필자 소개:
노용환 목사는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학부)과 실천신학(신대원)을 공부했다. 예배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교회 이콘과 상징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뉴욕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을, 블렌튼필 인스티튜트에서 상담학을 공부했고, 센트럴신학교 목회학박사과정을 통해 선교적 교회를 연구중이다.
200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2017년부터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UCC) 이중 소속으로 로드아일랜드 제일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생명문화연구소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했고, JOYFUL COOP(신나는 협동조합) 발기인 대표로 서류미비 싱글맘 렌트 지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미주 뉴스앤조이 기자로 활동하며, 선배기자들로부터 글쓰기를 배웠고, 실용적이지 않은 디자인의 가구나 오래된 그림처럼 무용(無用)하고 예쁜 것을 좋아한다. 또한 자전거와 캠핑 그리고 비치 라이프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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