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철의 에피포도엽서] 사망선고 by 임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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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선고 by 임지영 시인
창백한 안개에 싸여 걷고 또 걸었으나
끝내 길은 없었다
당신을 도려내고 미련 없이 돌아서던
그 서슬에 내 숨통마저 끊어졌음을
그때는 몰랐다
화석이 된 심장, 마지막 호흡 스러지고
무겁게 박힌 사망선고
내가 죽고 당신이 사는 가장 안전한 곳,
그 심연에서 떠오른 태고의 기억
단 한 줄기 숨조차
내 것 아니었음을
[시선의 여백]
임지영 시인의 시는 날선 검 처럼 선이 분명하다. 게다가 시선의 글 모양이 강하다. 그만큼 전달되는 메시지가 선명하다. 게다가 〈사망선고〉는 기독교 언어가 들어가지 않은 일반화로 성경의 구속과 은혜를 실제화하고 있다. 기독시가 지향해야 될 방향성이기도 하다.
“창백한 안개”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 하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를 상징한다. 하나님을 “도려내고” 돌아서는 순간, 화자는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끊어낸 것이다. 그래서 “내 숨통마저 끊어졌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죄는 곧 관계의 단절이며, 그 결과는 사망에 이르는 길이다.
“화석이 된 심장”과 “무겁게 박힌 사망선고”는 죄의 결과를 응축한다. 그러나 시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태고의 기억”은 창조의 기억,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신 그 순간의 정점이다.
마지막 고백, “단 한 줄기 숨조차 내 것 아니었음을”은 회개의 언어다. 숨은 소유가 아니라 선물이며, 생명은 자율이 아니라 은혜임을 인정하는 고백이다.
이 시는 결국 죽음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다시 생명의 근원을 향해 눈을 드는 순간을 담은 영적 성찰이다. 사망선고는 끝이 아니라, 은혜를 깨닫게 하는 판결문이며 선포이다.
작가 Profile
임지영 林枝英 Lydia J Lim (Irvine, California) 시인은 대구교육대학교 졸업. 대구매호초등학교 재직 중 2008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 제9회 세계한인기독언론협회 주최 신앙도서 독후감 수상을 계기로 본격적인 창작 활동 시작. 제28회 에피포도신인문학상(시)을 수상하며 등단. 작품을 통해 신앙과 치유, 공존, 그리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현재 JU Genesis Lab 공동창립자 겸 CFO. 얼바인 주교회 북클럽 팀장.

백승철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 ORU에서 박사학위, 캘리포니아 브레아(Brea)에 위치한 <사모하는교회 Epipodo Christian Church>의 담임목회자이며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에피포도예술과문학(Epipodo Art & Literature)의 대표이다. 다양한 장르의 출판된 저서로 25권 외, 다수가 있다. 에피포도(Epipodo)는 헬라어로 “사랑하다. 사모하다. 그리워하다”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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