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용환의 예술묵상] 레이머스바엘레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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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c1540, 마리누스 반 레이머스바엘레
빈 미술사 박물관(빈, 오스트리아)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레이머스바엘레는 생각만 해도 유쾌하지 않은 세금 징수원(Tax Collectors)이나 사채업자 그림들을 자신만의 느낌을 담아 유쾌하게 그려내던 ‘부당한 직업군’ 전문 작가입니다. 이 또한 역사적 사실이니, 재미를 담아서라도 누군가의 붓끝으로 남겨져야겠지요. 그래서 다행히, 메인 주제가 아니어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가까스로 작품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발음도 어려운 레이머스바엘레의 작품 앞에 서서 누가복음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떠올려 보자면, 발음보다 비유가 더 어려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복음서 최대 난제 중 하나인 오늘의 비유, 어떤 스토리가 담겨 있는지 작품에 시선을 맞춰 봅시다.
우선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누가 봐도 앉아 있는 사람이 사장님, 서 있는 사람이 매니저, 곧 청지기입니다. 옷 색깔도 고고하시고, 고급 수제 모자도 쓰신 데다가 반지까지 낀 채로 매니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실까요? 우선 빚 문서로 가득한 책상은 매니저의 작업 공간일 것입니다. 불시에 방문한 사장님이 매니저 의자에 앉아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주인인 당신의 소중한 돈을, 마치 본인의 것처럼 물쓰듯 쓰고 있다는 매니저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만큼, 질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편 비유의 결론처럼 매니저의 지혜를 칭찬하는 것 같은 표정처럼도 보입니다. 몸은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매니저에게 호의적인 느낌이고, 커다랗게 뜬 눈은 소문과 현상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심미안 같습니다. 상황과 표정이 어우러져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묘한 장면입니다.
매니저는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결론이 저 손 끝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눅 16:13)는 깨달음을 표현합니다. 사실 그의 표정은 아리송해서, 변명이나 늘어놓는 것처럼 보입니다. 매니저의 뒷편에 그림이 걸려 있는데, 마치 오늘날 만화책의 풍선 그림처럼, 매니저의 머릿속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퇴사 권고를 받고 매니저는 생각했지요.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눅 16:3). 그래서 채무자들을 불러 모아 빚을 뭉텅뭉텅 깎아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높은 이자에 허덕이던 사람들이 결국 퇴직할 자신을 돌봐주리라 생각한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이 매니저의 “약삭빠름”을 주인이 칭찬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플랑드르 화풍에서 그림 속 액자는 일종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냅니다. 매니저 사무실에 불과하지만, 이 정도 그림을 걸 수 있을 정도의 주인의 재력을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액자 속 그림의 내용은 매니저가 약삭빠르게 빚을 청산/감경해 준 장면입니다. 그 장면만 보면 아름답기 그지 없는 탕감의 장면입니다. 바로 그 비밀이 담긴 순간을 유심히 보도록 작가는 유도하고 있습니다.
무슨 비밀일까요? 매니저가 “아하”하는 순간입니다. 내 돈인 줄 알고 주인 돈을 펑펑 쓰던 매니저는, 퇴사를 앞두고는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내 돈이 아니고 주인 돈이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깨닫고 나니 어깨가 가벼워집니다. “내 돈도 아닌데 왜 그동안 그렇게 악착같이 채무자들을 괴롭혔을까?” ”내 돈도 아닌데, 왜 그토록 이루어 놓은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던가?” 하는 후회도 스쳐갑니다. 그의 낭비한 행위도 불의했고, 주인의 돈을 제멋대로 탕감한 행위도 불의했으나, 이 비유가 비추는 빛은 “불의함”을 판단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대신 퇴사 권고를 들은 직후, 매니저의 급격한 처신을 집중 조명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행운과 재물, 축복과 은혜는 내게 맡겨진 것이지,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선언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낭비와 추심만으로 꾸며진 일삼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됩니다. 그 순간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말씀과 이미지를 상상하며 함께 묵상합시다.
•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여기며 살아온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들(시간, 재능, 관계, 물질)을 어떻게 청지기답게 사용할 수 있을까?
• 불의한 청지기가 '퇴사 권고' 후에야 깨달은 것처럼, 우리도 위기의 순간에서야 비로소 보게 되는 진실이 있다면 무엇이며, 그 깨달음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손 모아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가 청지기임을 잊고 주인 행세를 했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소서. 맡겨주신 모든 것이 은혜임을 깨닫고, 이제 참된 주인이신 당신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예술 묵상 필자 소개:
노용환 목사는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학부)과 실천신학(신대원)을 공부했다. 예배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교회 이콘과 상징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뉴욕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을, 블렌튼필 인스티튜트에서 상담학을 공부했고, 센트럴신학교 목회학박사과정을 통해 선교적 교회를 연구중이다.
200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2017년부터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UCC) 이중 소속으로 로드아일랜드 제일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생명문화연구소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했고, JOYFUL COOP(신나는 협동조합) 발기인 대표로 서류미비 싱글맘 렌트 지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미주 뉴스앤조이 기자로 활동하며, 선배기자들로부터 글쓰기를 배웠고, 실용적이지 않은 디자인의 가구나 오래된 그림처럼 무용(無用)하고 예쁜 것을 좋아한다. 또한 자전거와 캠핑 그리고 비치 라이프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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