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용환의 예술묵상] 엘 그레코의 “성령 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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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ntecost
성령 강림, c. 1600, 엘 그레코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쁨도 잠시, 승천하신 주님 뒤로 쓸쓸한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작품의 배경처럼 공동체 가운데 암흑같은 어둠이 찾아왔습니다. 어둡고 외로운 이 때, 마치 엄마 손을 잃어버린 채, 광장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선 자녀의 마음으로 불안에 떱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요한 14:18) 엄마 없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셨던 주께서는 협조자, 곧 보혜사를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늘 함께 있어주고, 힘이 되어주고, 도움이 되어주시는 성령님입니다.
작품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우산같이 둥근 하늘에서 빛이 임합니다. 폭죽이 터지고 내려올 때처럼 이쁘게 내려옵니다. 각 사람 위에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작품의 중심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위치합니다. 시그니처 컬러인 블루 망토를 걸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합니다. 일부 제자들은 의심많은 도마처럼 실체를 경험해 보고자 손을 내밉니다. 놀라움과 경외로 저마다 역동을 표현하고 있을 때, 그 중심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존재는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혼자 두 손을 모으고, 잠잠히 그리고 고요히 하늘을 바라봅니다. 성령의 임재를 분명히 기억하고 기다리는 존재, 제자들이 흔들리지 않게 스스로 닻이 되어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 곧 어머니입니다.
성령 강림 공동체의 한 가운데에 왜 어머니를 그려 넣었을까… 출생의 비밀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마리아는 이미 성령을 한 번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태중에 임하실 때 말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성령을 처음으로 품은 몸입니다. 이미 성령을 알고 있는 지체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 14:17)라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열 달동안 품듯,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품습니다. 또 아이가 어머니를 가슴에 모시고 평생 살아가듯,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함께 살아갑니다.
며칠 있으면 어머니 주일입니다. 작은 교회에 아기 한 명만 있어도 회중 가운데 생명의 바람이 훅 지나갑니다. 그 바람은 성령을 닮았습니다. 모두 마음이 따숩게 됩니다. 그 바람의 시작엔 생명덩어리인 아이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자, 바람의 원천입니다. 어머니는 성령처럼 우리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어머니는 성령처럼 우리를 키워내십니다. 어머니는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는 우리를 대신하여 깊은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분, 성령과 가장 닮은 존재입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 지금 내 삶에서 "엄마 손을 잃어버린 채 광장에 우두커니 선 아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나요? 그 자리에서 성령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건네고 계실까요?
• 내 곁에서 말없이 두 손을 모아 나를 위해 중심을 잡아주었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 사람을 통해 나는 성령의 어떤 모습을 경험했나요?
손 모아 기도합시다.
성령님, 오늘 이 자리에 고요히 임하시어 흔들리는 저의 닻이 되어 주십시오. 저를 품어 키워주신 어머니처럼, 저를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예술 묵상 필자 소개:
노용환 목사는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학부)과 실천신학(신대원)을 공부했다. 예배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교회 이콘과 상징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뉴욕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을, 블렌튼필 인스티튜트에서 상담학을 공부했고, 센트럴신학교 목회학박사과정을 통해 선교적 교회를 연구중이다.
200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2017년부터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UCC) 이중 소속으로 로드아일랜드 제일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생명문화연구소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했고, JOYFUL COOP(신나는 협동조합) 발기인 대표로 서류미비 싱글맘 렌트 지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미주 뉴스앤조이 기자로 활동하며, 선배기자들로부터 글쓰기를 배웠고, 실용적이지 않은 디자인의 가구나 오래된 그림처럼 무용(無用)하고 예쁜 것을 좋아한다. 또한 자전거와 캠핑 그리고 비치 라이프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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