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철의 에피포도엽서] 우체국 Post Off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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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Post Office
기차 길을 따라 두 블록쯤 동쪽으로 걷다 보면 오래된 우체국 하나, 바람 속에 서 있다. 벽돌 틈 사이로 스며든 세월의 먼지와 빛바랜 창문은, 오래전 시간을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사람처럼 적막한 숨을 쉬고 있다.
도시는 이미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낡은 집들은 사라지고, 이름 모를 프랜차이즈 간판들이 골목의 얼굴을 바꾸어 놓고 있다. 하지만 내가 사는 동네는 이상하리만큼 느리다. 마치 유년 시절 한국의 작은 시골 마을 모습이 내려 앉은 풍경 그대로 늙어가고 있다.
변화를 거부하는 듯 가끔 자신의 존재를 긴 호흡으로 쏟아내는 기차 기적소리가 화폭에 담기며, 사라져 가는 것들의 이름을 한 음 한 음 불러내는 저녁 종소리로 그리워할 것을 채워주는 아름다운 선율로 물들인다.
하지만 요즘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우정국이 수익이 나지 않는 우체국을 하나씩 폐쇄하겠다는 소식 때문이다. 집 근처 허름한 우체국도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계절 앞에 서 있다.
이제 누가 우체국에 가느냐고. 시간 낭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이미 손바닥보다 작은 화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움직이고, 만나고, 계산하고, 사랑하고, 이별한다. 그들 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마치 각자 소견대로 행했던 사사시대처럼 말이다. 전에는 손 편지만 가능했던 소식도 손가락 끝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이 즉시 도착하고 소식도, 감정도, 관계도 너무 빨리 소비된다. 그 빠름으로 인해 기다림의 깊이까지 함께 지워버렸다. 세상은 점점 빨라지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더 조급해진다. 더 빠른 것에 대한 갈증에 목말라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과 사람사이 가슴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은행업무나 페이먼트도 인터넷 사용이 가능해 졌다. 점점 우체국 가는 일이 없어진 셈이다. 한때는 우표 한 장에 마음을 붙여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늘 작은 설렘이 남아 있었다.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 느림 속에 사람의 온기가 따뜻했다.
사라지는 것에는 그리움이 되기도 하고 추억이 되기도 하며 잊히기도 한다. 필자는 어떻게 하든 그 우체국을 살리기 위해 힘겹지만 우표를 사서 여전히 옛날 방식대로 우편으로 가능하면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다. 우체국 하나 사라지는 것이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정성과 노력이 담겨있는 마음이 무너지는 슬픈 전설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시대착오적이라고 웃겠지만, 내게 우체국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천년의 세월이 천천히 도착하는 장소이다.
지난 총회 기간 중 변의남 목사님을 통해 목사님의 아드님이 직접 손으로 쓴 감사 카드를 받았다. 얼마 전 결혼식에 참석해 준 것에 대한 짧은 감사의 인사였다. 정갈하지도 않은 글씨였고, 화려한 문장도 없었다. 그러나 그 몇 줄의 손글씨는 오래 비어 있던 가슴 한쪽을 가득 채웠다.
아마 그 편지는 나만 받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날 예식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졌을 것이다. 손으로 한 사람의 시간을 들였다는 것. 마음을 천천히 눌러 담았다는 것. 그 정성이 한 편의 서정시처럼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다.
“Take your rest in the Lord, waiting quietly for him.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시편 37:7).
잠잠히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인내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느린 사람에게만 들리는 마음으로 찾아오신다. 필경 천천히 걷는 사람들 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다. 우리가 잊고 살아온 다섯 번째 계절이다.
올 한해도 힘겹게 지나가고 있다. 습관처럼 “세월 빠르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쯤에서 천천히 가는 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백승철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 <Oral Roberts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 캘리포니아 부에나 파크 (Buena Park)에 위치한 <사모하는교회 Epipodo Christian Church>의 담임목회자이며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이다. 199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에피포도예술과문학(Epipodo Art & Literature)의 설립자이며 대표이다. 다양한 장르의 출판(영어, 한국어)된 저서로 31권 외, 다수가 있다. 에피포도(Epipodo)는 헬라어로 “사랑하다. 사모하다. 그리워하다”의 뜻이다. usae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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