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용환의 예술묵상] 루벤스의 “스데반의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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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yrdom of Saint Stephen
스데반의 순교, 1616-1617, 피터 폴 루벤스
발랑시엔 미술관 (발랑시엔, 프랑스)
2026년 4월, 여기 저기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틈에, 이스라엘 군인이 해머로 예수상을 내리친 사건이 벌어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생각해 봅니다. 원래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고자 칼을 갈았을까? 군복을 입은 김에 광기 어린 개가 되었던 걸까? 선임이 장난으로 시킨 일을 무지성으로 해낸 것뿐이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이어지면서 사유의 외길에 다다릅니다. ‘인간 내면의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는 법인가?’
오늘 감상하는 루벤스의 작품에는 폭력적인 육체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사람을 둘러싼 분노한 군중, 대개는 상의 탈의한 남성입니다. 돌을 쥔 손 매무새는 한결같이 능숙해 보입니다. 표정은 숭고합니다. 그들이 일을 벌이고 나서 남은 것은, 그저 한 생명의 죽음일 뿐입니다. 어쩌면 그들도 집에 가서, 종교적 성인 남성의 책무를 다하느라 벌였던 <살인의 기억>으로 PTSD를 겪고 맨 정신으로 잠 못들지 모르겠습니다. 관습화된 폭력이 결국 여러 사람 죽입니다. 생각 없이 하던 대로 행한 폭력이 한 땀 한 땀 모여 인류 최악의 죄악이 되어갑니다. <악의 평범성>입니다.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화면을 상승시키듯 아래에서 위로 대각선이 그어지고, 천상의 세계가 불현듯 나타납니다. 그 두 세계를 어어내는 천사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허공의 동아줄을 잡고 내려오는 듯 월계관을 스데반에게 씌워주려 합니다. 구름 위 천상에 가득한 빛이 스데반의 머리 위에도 발현됩니다. 그 빛의 근원을 따라가보니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옆에 서 계십니다.
하늘은 고통받는 자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실낱같은 믿음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마 5:10) 스데반은 그에게 주어질 아버지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신을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군중들을 바라보며 저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라는 최후의 메시지를 남기고 본향으로 향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분노 대신 용서를, 저주 대신 기도를 선택한 하늘 사람입니다. 순교했기에 천국 간 것이 아니라, 천국의 언어로 일상을 향유했기에 자연히 도달한 곳이 바로 천국인지 모릅니다.
루벤스는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여러 컷의 사진처럼 상상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컷을 남긴 것 같습니다. 스데반은 쓰러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고통은 잠시일 뿐, 하늘문이 열리는 순간으로 직행합니다. 스데반은 예수의 <길>을 좇아 예수라는 <진리>를 전하다가 썩어질 생명 대신 예수 <생명>을 얻었습니다. 고통이 절정에 이를수록 하늘은 가까워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는 약속이 아득히 떠오르며 눈을 감습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 나는 지금 어떤 군중 속에 서 있습니까? 돌을 쥔 손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리에 있지는 않습니까?
• 스데반이 마지막 순간 저주 대신 기도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특별히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천국의 언어로 살아왔기 때문이라면, 오늘 내 일상의 언어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손 모아 기도합시다.
폭력이 숭고한 표정을 하고 떼지어 걸어다니는 이 세상 가운데, 나도 모르는 사이 돌을 쥐고 있을 제 손을 살피게 하소서. 이 세상 고달픔 가운데서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걷게 하소서.
예술 묵상 필자 소개:
노용환 목사는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학부)과 실천신학(신대원)을 공부했다. 예배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교회 이콘과 상징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뉴욕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을, 블렌튼필 인스티튜트에서 상담학을 공부했고, 센트럴신학교 목회학박사과정을 통해 선교적 교회를 연구중이다.
200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2017년부터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UCC) 이중 소속으로 로드아일랜드 제일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생명문화연구소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했고, JOYFUL COOP(신나는 협동조합) 발기인 대표로 서류미비 싱글맘 렌트 지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미주 뉴스앤조이 기자로 활동하며, 선배기자들로부터 글쓰기를 배웠고, 실용적이지 않은 디자인의 가구나 오래된 그림처럼 무용(無用)하고 예쁜 것을 좋아한다. 또한 자전거와 캠핑 그리고 비치 라이프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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