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용환의 예술묵상] 모리스 드니의 “엠마오의 순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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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의 순례자들, 1895 석판화, 모리스 드니
반 고흐 박물관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엠마오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와 성찬 같은 전례도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있는 성스러운 예식입니다. 작가는 이 두 삶의 자리가 겹쳐지는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작품 중앙의 예수님 또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의 모습으로 반투명입니다. 식탁 너머 마을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골든 컬러가 뒤덮인 해질녁, 곧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환상이 도시라는 현실을 덮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이겠지요. 인간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 건물마다 황금으로 채색해도, 하루 한 번 도시를 덮는 황금빛 석양의 우아한 자태를 담아낼 수는 없음을 돌아보게 하는 순간 자체가 작품 속 작품입니다. 엠마오 성찬의 의미를 예견하듯, 도시의 금빛 풍광이 마치 식탁 옆 예술작품처럼 자리를 잡았습니다.
왼쪽부터 다시 작품을 찬찬히 봅시다. 활짝 열린 현관 너머 바깥은 여전히 환합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여관에 짐을 싣고 들어오는 여행객들로 분주합니다. 불과 며칠전 사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진위 여부와 상관 없이 사람들은 먹고, 자고, 이동하고, 만나고, 떠들고, 울고 웃으며 일상을 보냅니다.
실내는 반대로 어둡습니다. 해가 아직 남아있지만 촛불을 밝혀야 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의 뒷편에는 마치 성찬위원처럼 고고하고 정중한 잔과 그릇을 든 여인들이 서 있습니다. 갈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작가의 아내입니다. 마찬가지로 갈색 겉옷을 입고 테이블 앞에 앉은 남성은 작가, 드니 자신입니다. 많은 일들이 세상에서 일어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눈 감고도 알아맞출 수 있는 반복과 권태가 이어지는 곳이 바깥 세상입니다. 정작 깊은 성찰과 기적은 세상이 볼 수 없는 곳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알아차림의 신비>는 여전히 예수 앞에서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누가 24:16) 성찬을 앞에 두고, 격식을 갖추어 주님을 영접하더라도, 다시말해 종교 생활을 숱하게 반복하더라도 주님을 알아보고, 인격적으로 만나는 영광의 그 날, 그 순간은 쉽게 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만나기 쉽지 않다는 것이 엠마오 식탁 이야기가 강조하는 주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상의 순간, 우리 곁에 동행하신 예수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쳤을지 돌아보는 것이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작가가 자신의 일상 속으로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을 유심히 다시 감상해 봅시다. 진리는 황금빛을 내비치는 도시나 자연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분주하게 관계하고 바쁘고 성실하게 살아갈 때 느껴지는 보람이 쌓이다 보면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금빛 세상은 곧 칠흑같은 어둠에 덮이기 마련이고, 공든 탑도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창문 너머, 현관 너머의 허상이 아닌, 기쁨의 식탁 앞에 나아올 때 그리스도는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삶의 고뇌를 가지고 나아오든, 매일 똑같은 반찬에 시큰둥 하며 무심코 나아오든, 주님께서 떼어주시는 빵을 고대할 때 우리 보잘것 없는 일상은 기쁨의 잔치요, 예배로 베일을 벗게 됩니다. 남의 잔치, 남의 비즈니스, 남의 간증이 얼마나 화려하고 감동적인지에 대한 관심을 넘어, 지금 내 식탁에서 주께 의탁할 일을 돌아보는 것, 그것이 작가가 한 일이고, 석판화로 만들어 여러 미술관에 전한 일이며, 우리에게도 전하는 영적 지도입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 반복되는 식탁, 익숙한 관계, 권태로운 하루 속에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간 "동행하신 예수님"의 순간이 있다면 잠시 떠올려 봅시다.
• 나는 지금 창문 너머 황금빛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식탁 앞에 앉아 있습니까? 내가 진리와 기쁨을 기대하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손 모아 기도합시다.
주님, 당신은 오늘도 제 곁에서 함께 걸으셨는데, 저는 눈이 가려진 채 지나쳤습니다. 지금 이 식탁 앞에 나아올 때에 빵을 떼어 주시고, 제 눈을 열어 주소서.
예술 묵상 필자 소개:
노용환 목사는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학부)과 실천신학(신대원)을 공부했다. 예배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교회 이콘과 상징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뉴욕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을, 블렌튼필 인스티튜트에서 상담학을 공부했고, 센트럴신학교 목회학박사과정을 통해 선교적 교회를 연구중이다.
200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2017년부터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UCC) 이중 소속으로 로드아일랜드 제일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다. 생명문화연구소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했고, JOYFUL COOP(신나는 협동조합) 발기인 대표로 서류미비 싱글맘 렌트 지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미주 뉴스앤조이 기자로 활동하며, 선배기자들로부터 글쓰기를 배웠고, 실용적이지 않은 디자인의 가구나 오래된 그림처럼 무용(無用)하고 예쁜 것을 좋아한다. 또한 자전거와 캠핑 그리고 비치 라이프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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