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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한 가인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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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EWS M| 작성일2021-11-15 | 조회조회수 : 20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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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읽는 창세기 (2)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는다고 동생을 죽인 가인, 이로 인해 유랑의 벌을 받은 그가 길을 떠나면서 두려움에 떨자 하나님은 누구도 그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용서를 한다. 해석하기 참 쉬운 본문이다. 인류학적으로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갈등으로 해석되고, 2인자를 허락안하는 장남과 끊임없이 장남의 자리를 엿보는 차남간의 권력투쟁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것을 텍스트로 삼는 교회 현장에서도 쉽게 이해되기는 마찬가지다. 제물의 질적 가치와 드리는 자의 마음 가짐에 따른 결과의 차이, 범죄와 용서, 약속과 생명보장 등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익숙한 해석 속으로 나태하게 빠져든다. 결국 가인은 제물을 믿음으로 바치지 않은 불경한 자로 판명된다. 히브리서(히11:4) 저자와 요한 일서(요일 3:12)저자도 그렇게 해석했으니 할 말은 없지만 제물의 가치에 따라 하나님의 대응이 달라진다면 십일조를 안 드리면 암에 걸린다는 어느 엉터리의 헛소리도 옳아야 한다.


그러나 첫번째 살인 사건을 다룬 본문 어디에도 아벨이 드린 제물의 질적 가치가 가인의 제물보다 더 우수했다는 설명은 없다. ‘맏이’라는 단어가 있으니 그것을 ‘첫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첫 것’은 처음일 때 중요하지 양떼가 많아진 다음에 맏이 양은 그냥 늙은 양일 뿐이다. 창세기의 원역사 속 사건을 시간 순으로 설명하는 것이 많이 어색하지만 문자주의적으로 보면 레위기 율법이 제정되기 전이므로 제사 규정도 없었다.


살인 후 아벨을 찾는 하나님에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항변하는 가인에게서 약자를 죽음의 궁지에 몰아 넣는 기득권자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진보적 해석에도 헛점은 있다. 그날 사건 현장에서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아벨은 강자였다. 계급적 해석을 하고 싶다면 이유없이 제사가 거부된 버려진 자 가인이 하나님의 편에 선 강자 아벨에게 저항한 것으로 보는 편이 훨씬 진보에 가깝다.


가인의 분노와 그에 따른 살인에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충분하다. 창세기의 세계 속에서는 이 사건 전까지 죽음은 개념(창세기 3:17)으로만 존재했지 실체적 죽음은 없었다. 가인은 죽음에 대한 이해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아벨을 ‘그냥 내려친’ 것이다. 그 분노의 표현이 죽음으로 이어지자 나에게 아벨이 어디 있는지 왜 묻느냐고 따지는 가인의 행동에는 호소력이 있다. 이 항변에 가인은 “당신이 죽음이란 걸 ‘제정’했으니 당신이 미리 가르쳐 줬어야지요”라는 함의를 담았다. 


자신의 제물은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 수용되어야 한다는 가인의 독선과 분노는 분명한 잘못이지만 제사를 차별한 하나님의 괴팍함에 비한다면 그의 분노는 이해할 정도의 수준이다. 그러면 왜 제사를 차별했는가? 정확한 답은 하나님만 알 것이다. 그런데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은 살해 이후에 초점을 맞출 때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분노한 하나님은 농경민 가인의 생업을 저주한다. 가인이 아무리 수고한들 땅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며 땅 위에서 아무 것도 안하는 휴식 조차도 거부된다. 유랑만이 가인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다. 유랑의 형벌을 받은 가인에게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자신이 저지른 비참한 죽음을 처음 목격한 그는 똑같은 일을 당할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세기 4:14-15)


누구에게도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표식을 가지고 유랑에 나선 가인은 어디로 갔을까? 신약 몇 부분에서 ‘불의’의 대명사로 소환될 뿐 가인의 이름은 창세기 5장부터 사라진다. 창세기의 익숙한 서사 방식은 가인의 죽음 정도는 다루어야 했다. 사람에게는 죽임을 안 당했지만 벼락을 맞아 죽었다던가 해야하는데 죽음의 기록이 없다.


아벨의 죽음 이후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셋과 그 후손들은 ‘정통’가문으로서 그들의 죽음이 창세기 5장부터 기록되지만 가인은 사라진다. 이미 4장에서 소개된 가인의 후손들은 악기를 만들고 농기구를 만들어도 그들의 죽음은 기록되지 않는다. 수명이라는게 죄없는 가문에게만 주어진 혜택인가?


여기서 사건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반드시 하나님에게 닿아야 하는 업적과 결과를 선호한 인물이었다. 그는 유랑을 멈추고 아들 에녹의 이름을 따서 도시를 세우고 그들의 후손들도 업적으로만 기억된다. 야발은 장막을 치고 살면서 집짐승을 치는 문화를 만들었다. 정착형 농경과 유랑형 유목을 하이브리드시킨 가축의 시대를 연 것은 그의 업적이었다.


가인의 후손들은 업적으로 기억되는 가죽을 남긴 호랑이인 반면 셋의 후손들은 그냥 삶으로 기억되는 이름만 남긴 사람들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로 유명한 포르투갈의 노벨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2009년 마지막 작품 ‘카인(정영목 옮김, 해냄)’을 남겼다. 그는 성서에서 가인이 죽은 기록도 없고 죽임을 당한 기록도 없는데 착안해 영생한 가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구약성서의 연대기는 무시되는 즉 타임 슬립(time slip)을 한다. 욥도 만나고 나중에 노아도 만난다. 가인은 욥을 만나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의인이 받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욥의 고난을 보면서 가인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말했듯이 가인 이전에는 죽음이 없었기 때문에 살인은 죄가 아니었고 가인의 범죄 이후 처음으로 죄가 되었으니 그는 억울할만도 했다.


소설의 마지막은 가인이 노아를 비롯해 방주의 모든 가족을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노아는 행위와 보상의 인과관계가 ‘성서답지 않게(?)’ 딱 맞아 떨어지는 인물이다. 노아는 의인이었고 그 보상은 생존이었다. 게다가 노아의 방주 사건은 하나님의 후회와 반성을 이끌어 내었다. 가인에게 이것은 모순이었다. 자신이 인류의 첫 살인을 저지를 때 하나님은 살인의 심각성에 대해 고지하지 않았고 가인에게 사과하기는 커녕 그를 질책했다. 농사 수확물로 먹고 살던 그에게 유랑은 죽음에 다름없는 형벌이었다. 그는 그렇게 땅을 떠났고 복수심을 쌓아 가다가 노아를 만났으니 분노가 폭발했다.


주제 사라마구는 성서와 마찬가지로 가인의 죽음의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노아의 죽음에서 그쳐버린 그의 상상력을 연장하면 가인은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 된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의 개념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영토화란 지금껏 인류가 살아온 방식 즉 영토에 기초한 문화를 말한다. 목축 농경 모든 것에 영토가 필요하다. 이런 유형의 경우 말고도 익숙한 철학적 개념이나 고정관념 같은 것들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준다.


들뢰즈는 여기서 벗어나라고 , 즉 익숙한 것과 결별하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탈영토화다. 철학은 여기서 생산된다. 철학에 기반한 탈영토화 작업은 자본주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도덕이나 윤리도 탈영토화해야 하는데 ‘도덕’이라는 종교는 그 힘이 막강해서 쉽게 해체되지 않는다. 들뢰즈는 웃음과 해학으로 이것을 풀어내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들뢰즈는 엄숙주의 계몽주의의 늪에서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하는 좌파들에게 인기가 없다.


그 틈새의 균열을 눈치 챈 퇴행적인 세력은 그것을 다시 본래의 영토 속에 묶어 두려는 재영토화를 시도한다. 겨우 탈영토화의 걸음마를 걷기 시작한 한국 사회가 이 걸음마를 불안하게 보는 세력들에 의해 다시 퇴행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유랑은 영토에 뿌리박고 살던 가인에게 주어진 선물이었고 형벌이 아니라 탈영토화의 기회였다. 가인에게 유목민의 삶을 살던 아벨같은 삶을 살아보라는 추천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그 살인의 현장에 대해 미안한 감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를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한 징표를 줌으로써 그가 마음 껏 세상을 살아가도록 멍석을 깔아 주었는데 그가 처음 한 일은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따 도시를 세워 정착한 일이었다. 죄를 용서한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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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de Zurbaran, Agnus Dei, 1640

 

영화 ‘미션(감독 롤랑 조페, 1986년)’에서 동생을 죽인 로드리고(로버트 드니로 분)는 속죄의 고행을 하다가 가브리엘 신부(제리미 아이언스 분)를 만나 원주민과 함께 한다. 가인은 이러한 길을 갔어야 하는데 성서에서는 ‘재영토화’를 택했고 주제 사라마구 소설에서는 복수의 화신이 되었다.


신앙은 무엇이고 속죄는 또 무엇인가? 감옥과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탈영토화 하는 작업이다. 반면에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대중들을 기존의 영토 속에 묶어 두려 한다. 이것을 깨치고 나오는 것이 폴 틸리히가 말한 ‘존재의 용기’이고, 과거에 묶여 있는 것이 속죄하지 못한 가인의 삶이다. 죄의 사슬을 끊고 탈영토화하지 못한 속죄는 거짓 속죄인데 이 거짓 속죄가 우리를 지배한다면 가인이 아직도 우리 곁에 동행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가인 사건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한 신약의 본문은 유다서에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욕합니다. 그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들처럼, 본능으로 아는 것 바로 그 일로 멸망합니다. 그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가인의 길을 걸었으며, 삯을 바라서 발람의 그릇된 길에 빠져들었으며, 고라의 반역을 따르다가 망하였습니다. (유다서 1:10-11)


[기독교 세계관의 시원이 되는 창세기를 철학, 문학, 영화 등을 통해 인문학적으로 해석해 보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입니다. 전통 신학의 해석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며 독자들의 이해를 바랍니다.]

 

김기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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