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종기 목사의 성경과 정치신학] 제2부 4장 III. 가나안에 기획된 거룩한 나라의 구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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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사시대 신정정치의 구조에 대한 논쟁
여호수아와 같은 걸출한 지도자의 시대가 지나가고 사사시대가 지속되는 동안, 이스라엘은 어떠한 정치체제를 유지하였을까? 솔로몬의 성전이 건립되던 시대가 출애굽 이후 480년이 지낸 해(왕상 6:1)였다면, 왕정이 들어서기 전 이스라엘은 약 300-350년의 사사시대를 거쳤다고 판단할 수 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 시작 연도는 대략 기원전 998년으로 본다. 480년 전에 출애굽이 있었다면, 출애굽의 연도는 기원전 1446년이며, 이러한 견해는 출애굽 관점에 대한 초기설에 해당한다. 이러한 계산에 의하면, 광야 40년, 여호수아 사사시대가 300-350년이며, 사울과 다윗의 시대가 80년에 이른다. 이러한 초기설(15세기 중심)에 대조되는 후기설(13세기)은 출애굽을 기원전 13세기 라암세스 2세 시대로 보기도 한다. 다음을 참고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왕상 6:1).]
이 짧지 않은 시대 동안 사사들이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가졌음에도 12지파 전체를 모두 다스리지는 못하였다. 사사시대는 12지파 전체에 대한 지도력을 행사한 여호수아 시대처럼 전국적 영향력을 가진 사무엘의 시대 사이에 놓여있다. 아울러 이 시대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언급되지 않고 흘러간 잊어버린 시대와도 같이 여겨진다. [사사시대는 성경의 언급에서 항상 생략되거나 축소된 부분이었다. 첫째, 스테반 집사는 사도행전 7장의 이스라엘의 역사 서술에서 사사시대에 대하여 한 줄도 할애하지 않는다. 둘째, 구약의 역사 회고 시편(Historical Psalms)에서 사사시대에 대한 신앙의 교훈은 부정적이거나 짧다(시 78:55-69, 105:44-45, 106:34-46). 셋째, 느헤미야 9장 공동체의 참회 기도와 역사 요약의 부분에서 사사시대의 타락상에 대한 언급만 존재한다(느 9:23-31). 넷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역사 요약 설교에서도 바울은 사사시대를 한 절로 간략하게 처리한다(행 13:19-20). 다섯째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에서 아벨부터 시작하여 족장들, 모세, 사사들, 다윗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믿음'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일관되게 정리하는 중에 10명의 믿음의 후손을 기록한 후에 한 절에 6명의 이름을 기록하며 기드온 바락 삼손과 입다 다윗과 사무엘을 거론하는 중에 4명의 용사였던 사사를 거론한다(히 11:32-34).]
대제사장과 제사장, 장로, 선지자와 사사와 같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직위가 존재했지만, 이러한 지도적 인물들이 어떠한 체제를 구성하고 있었는지는 별로 거론되지 않았다. 외견상 경시되고 밟고 지나가는 징검다리 기간으로 보이는 사사시대가 가진 특성과 기능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하여 이루시려고 했던 그 시대의 정치적 의미에 대하여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여러 학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논의하려 한다.
종교사회학적 관점을 가진 막스 베버는 사사시대의 특성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남긴 사회학자이다. 베버는 가나안의 히브리인 공동체가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사사(士師, judges)에 의해 인도된, 종교와 사회가 분리되지 않은 언약의 구조를 가진 시대의 공동체라고 보았다. [Max Weber, Das Antike Judentum, trans. & ed. by Hans Gerth and Don Martindale, Ancient Judaism (New York: The Free Press, 1967), 75-79.] 베버는 사사라는 지도자의 특성을 규명하려 했고, 당시의 사사시대를 정치ㆍ종교ㆍ사회학적인 특성을 가진 언약 공동체로 보았으며, 여호와를 섬기는 언약 중심의 정치적 연맹체(confederacy)를 이룬 것으로 간주하였다. 카리스마적 리더인 사사들은 평상시의 행정관이 아니라, 대부분이 위기 때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일어나서 정치-군사적 역할을 담당한 ‘카리스마적 군사 지도자’라고 해석하였다. [Max Weber, Ancient Judaism, 85.] 베버가 주장하였듯이 고대 이스라엘은 ‘종교 중심의 언약적 연맹체’라는 사회학적 차원의 주장은 이후 마틴 노트(Martin Noth)가 세우는 사사시대에 대한 새로운 가설의 토대가 되었다.
베버에 의하여 개발된 이스라엘의 ‘사회 유형론’은 20세기 전반, 마틴 노트의 “근린 동맹” 곧 “앰픽티오니(amphictyony) 가설”로 더욱 구체화 되었다. 노트는 자신의 대표적 저술인 『이스라엘의 12지파 체제』(Das System der zwölf Stämme Israels)와 『이스라엘의 역사』(The History of Israel)에서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이 그리스 도시 국가의 종교적이며 안보동맹인 “근린 동맹”에 가까운 종교적 연합체였다고 설명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델피와 테르모필레의 신전을 중심으로 인근의 도시 국가들이 모여 종교적인 신성동맹을 이룬 것처럼, 사사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이스라엘의 종교ㆍ정치적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이 주장은 1930년대 이후 약 50년 동안 사사시대를 설명하는 패러다임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노트에 의하면, 길갈, 벧엘, 세겜과 실로를 중심으로 법궤를 모신 중앙 성소가 12지파의 구심점을 이루었고, 이를 토대로 정치신학적 연맹체가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중앙집권적 왕정 국가가 나타나기 이전에 12지파를 중심으로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각 지파의 동등한 지위를 유지하는 연맹 혹은 연방 체제로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12지파의 임무는 한 달에 한 번씩 중앙 성소를 관리하고 물자를 공급하는 실용적 목적을 가졌다는 것이다. [Martin North, The History of Israel, 85-97, 97-108.]
이러한 주장이 체계화되어 유행하는 동안에도 노트의 주장에 반대하는 다양한 학자들의 문제 제기가 뒤따랐다. 근린 동맹의 가설이 도전받는 이유는 중앙 성소의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 비교적 평등한 12지파의 확립에 대한 의문, 성소에 대한 관리 책임의 유지에 대한 의심, 그리고 중앙 성소를 중심으로 한 일관된 전국적 제의의 유지 등이 문제 제기의 핵심적 사안이 되었다. 그의 견해는 고고학, 성서학과 역사학적 관점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으나, 사사시대의 체제를 설명하려는 가설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A. D. H. Mayes, “Amphictyony” in The Anchor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1992), 210-216.] 새로운 밀레니엄에 이른 지금 노트의 근린 동맹 가설은 이전의 권위를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대안적 서사의 제공이라는 면에서 그 효용성이 인정된다.
월터 브루그만은 그의 스승 알브레히트 알트(Albrecht Alt)와 함께 마르틴 노트가 구약학 연구에 남긴 지대한 공헌을 자신의 책 『구약신학: 증언, 변론, 옹호』(Theology of the Old Testament)에서 인정한다. 브루그만은 스승 알트의 연구가 남긴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하나님”(the God of the Fathers)이라는 신관과 “절대적 신법”(apodictic law)이라는 율법의 기초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틴 노트가 이스라엘 민족의 특성을 사사시대 12지파의 동맹에 대한 논의로 발전시켰다고 해석한다. [브루그만은 알트와 노트를 같은 항목으로 다루면서 그들이 구약신학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말한다. 알트의 공헌은 중근동의 신관과 대조되는 “조상들의 하나님”과 결의론적 법(casuistic law)에 대조되는 “절대적 신법”에 대한 긍정이다. 이러한 신관과 율법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특성을 빚어내는 기초이다. 다음을 참고하라. Walter Brueggemann,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Testimony, Dispute, Advocac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7), 20-22.] 브루그만에 의하면, 노트의 지파 동맹의 가설이 한동안 구약학계를 장악하였고, 역사적 바탕에서 신학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브루그만은 노트의 공헌이 고고학적인 역사적인 검증을 통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주조하는 중요한 상상력의 기초를 놓는 서사를 제공하였음을 주장한다. 브루그만은 이스라엘에서 역사성을 의심받는 노트의 “근린 동맹”(amphictyony)이라는 말보다는 “지파 연맹체”(tribal confederacy)라는 용어를 쓰면서 노트의 공헌을 수사학적 비평의 차원에서 수용한다.
브루그만은 노트의 공헌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이스라엘은 독특한 법과 공동체의 충성스런 언약적 합의가 존재하는 공동체라는 점에 대한 노트의 확인이다. 둘째는 노트는 이스라엘이 언약적 합의가 만드는 시민적ㆍ종교적 삶과 지파 동맹의 의식을 가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셋째로 지파 동맹이 만들어 낸 정체성은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실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노트는 설명한다. [Brueggemann,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22-24.] 결국 브루그만은 노트의 공헌을 통해 사사시대 정치체제의 특성을 이스라엘이 언약적 공동체로서 압제적 왕정 체제, 중앙집권적 체제와는 대조적인, 자유로운 지파 연맹의 가능성을 조명한 것으로 바르게 파악하였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