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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회심주간 288주년 기념] 요한 웨슬리의 발자취를 따라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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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재웅 목사| 작성일2026-05-15 | 조회조회수 : 8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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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리에게 뛰어난 조직력이 없었다면 그의 영향은 당대에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웨슬리는 교회를 분리할 의시가 전혀 없었고 오직 목표가 있었다면 그가 사랑하는 영국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데 그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거듭남’을 체험한 평신도들은 신도회(Society)를 조직하여 성서연구, 기도, 신앙훈련, 그리고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웨슬리 운동은 급속히 성장하여 성직자가 모자랐고 회중들에게 설교를 해줄 수 있는 순회설교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순회설교자들을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말씀을 전파함과 동시에 속회를 인도하고 심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744년 요한 웨슬리와 챨스 웨슬리, 그리고 같이 일하던 4명의 영국 교회 성직자들과 4명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모여서 연회(Conference)를 조직하게 됩니다. 1791년 웨슬리 형제가 사망하였을 때 영국에는 313명의 목사와 76,968명의 신도가 있었고 미국에는 198명의 목회자와 56,621명의 신자들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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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Central Methodist


도전과 위기, 신학적 논쟁


영국교회의 목사와 평신도중에는 감리교 지도자와 평신도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특히 감리교 운동 초기에는 어려움을 준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영국교회에서 허락하지 않는 야외설교를 한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웨슬리의 죄악에 관한 단순한 논리와 복음주의적인 체험에 대한 말씀 선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체험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감정에 치우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웨슬리가 평신도 전도자를 등용한 것이라든지 교구의 경계에 제한되지 않고 여기 저기 순회하며 하는 설교를 불쾌하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남자들 중에는 자기 부인들이 감리교 채플에서 보내며 아픈 사람들을 심방하는 등 너무나 많은 시간을 가정 밖에서 쓰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웨슬리가 가정의 가치를 침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영국교회의 분열을 조장한다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를 영국교회를 분열시키려고 노력하는 위장된 가톨릭 교인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감리교인들은 만화와 풍자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웨슬리와 그의 설교자들과 감리교인들에 대한 폭도들의 폭력 때문이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해가 지나면서 극렬한 핍박은 그쳤지만, 예정론과 자유의지, 신앙과 이성간의 관계, 이 세상에서의 온전으로의 가능성, 감리교인들이 강조하는 종교적인 체험, 감리교인들이 영국 교회를 떠나야 하느냐 하는 문제들을 놓고 신학적인 논쟁이 심화되었습니다. 다른 문제들이 요한 웨슬리의 삶에 암운을 드리웠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애정문제였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결혼생활과 지도력


1748년 웨슬리는 자신보다 13살 연하의 감리교 신자이며 과부인 그레에스 머레이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결혼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지만 챨스 웨슬리의 방해로 인하여 그레이스는 다른 감리교 설교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절망에 빠진 요한 웨슬리는 자기 동생의 결혼 방해에 극도로 화가 났었고 이 일로 인해서 형제간의 관계는 거의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1751년 2월 결혼을 했지만 이 결혼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메리 바제이, 혹은 몰리라고 부르는 뷰유한 상인의 미망인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못되어 그는 부인과 갈등을 겪게 되어 외부사역에 신경을 쏟고 가정과 부인에 등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인인 몰리는 요한 웨슬리가 계속해서 집을 비우고 다른 많은 여성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에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1757년부터 두 사람은 몇 차례 별거를 하였습니다. 결국 아내가 1781년 사망할 때에도 웨슬리는 외출 중에 있었고 장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지도하는데 있어서 독재를 한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그는 감리교가 자신의 꿈과 이상에 맞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끌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리교 운동의 선구자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예외없이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질때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습니다. 그에 의하면 감리교운동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이런 운영 방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유롭게 떠나도 좋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감리교인들은 그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당시 영국 감리교회를 향해 “나는 메도디스트(Methodist) 즉 감리교회라고 불리는 교회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없어질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단지, 그 교회가 능력이 없이 종교의 형태만 지닌채 한낱 죽은 단체로 전락할까 봐 염려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말년에 이르러서는 많은 영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계속>


장재웅 목사(워싱턴 하늘비전교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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