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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회심주간 288주년 기념] 요한 웨슬리의 발자취를 따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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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재웅 목사| 작성일2026-05-04 | 조회조회수 : 10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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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의 죽음과 조지아 선교여행 


1735년 아버지의 별세후 요한과 챨스 웨슬리는 당시 영국교회의 선교기관이었던 복음전도협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선교사로 자원을 하게 됩니다. 요한 웨슬리는 이러한 선교사역이 초대 기독교인들이 행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1735년 가을, 웨슬리 형제는 선교사 자격으로 영국의 새 식민지였던 미국 죠지아주에 있는 원주민들을 향해 떠나가게 됩니다. 새 식민지를 향해 항해하던 도중 선상에서 심한 폭풍을 만났는데 함께 탑승한 26명의 모리비안 교도들이 기쁘게 찬송하는 것을 보고 젊은 요한 웨슬리는 “어떻게 저들을 내가 갖지 못한 내적 평화와 위로를 지녔을까?”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두 달 동안의 험난하고 고생스러운 항해 끝에 그들은 1736년 2월 6일 미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때 요한 웨슬리는 적어도 3가지 목표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조지아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식민지 개척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둘째, 미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셋째,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인 죠지아주에서의 요한 웨슬리의 경험은 환멸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요한 웨슬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원주민들이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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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는 성실하게 정열적으로 일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교사역에 냉담하거나 반항적이었습니다. 인디언들과의 접촉도 빈번하지 못했고 효과도 별로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한 웨슬리가 섬긴 교구의 교인이었던 소피 합키라는 여인과의 불행한 사랑은 결국 대 배심원의 기소를 받게 되어 식민지를 떠나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선교사 생활을 시작한 지 2년이 채 못된 1737년 12월 죠지아를 떠나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동생 챨스는 그 때 이미 영국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자 모라비안과의 만남


그러나 미국에서의 경험이 모두 부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조지아로 가던 배안에서 식민지에서 머무는 동안, 또한 영국으로 돌아오던 때 배안에서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인 모라비안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니콜라스 루드윅 폰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적인 지도하에 있었던 그룹으로 모라비언들은 영적으로 훈련된 내적인 긴밀한 교제안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한 개인적인 신앙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들이 보여주는 신앙과 위로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그들의 확실한 신뢰와 체험을 부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계속>


장재웅 목사(워싱턴 하늘비전교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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