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종기 목사의 성경과 정치신학] 제2부 구약교회의 신정정치 - 3. 시내산 언약의 정치신학적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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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내산 언약의 정치신학적 공헌
중근동의 정치에서 고대 종교는 왕가의 후원자 역할을 행했다. 원시 종교와 달리 고대 종교는 영역 상으로 국가와 분리되었으나, 아직 국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 종교의 경우는 달랐다. 경전을 가지고 문맹을 퇴치한 선지자가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유대의 여호와 신앙은 역사 종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역사 종교는 공동체에 분명한 신관(神觀)을 제시하므로 왕의 역할을 상대화시켰으며, 경전으로 주어진 언약서 율법은 윤리적 의무를 보편화시켰다. [로버트 벨라는 종교의 발전 과정에서 최초의 역사 종교로서 “기축적인 시대”(800-200 B.C.)를 구성하는 유대 왕국, 그리스, 중국과 인도의 경우를 소개한다. 책의 후반부는 이러한 나라의 역사 종교에 대한 설명인데, 유대교는 역사 종교의 전형이다. Bellah, Religion in Human Evolution: From the Paleolithic to the Axial Age (Cambridge: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 Press, 2011), 265-323.] 왕의 역할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왕은 보편적인 신법의 가르침에 복종하여야 했다. 중근동의 왕조적 전통 속에서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이 신법을 제공하는 입법자(lawgiver)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종이였다. 신왕, 신법을 가진 상황이 만들어 낸 유대민족의 정치신학적 차별성은 다음과 같이 집약될 수 있다.
첫째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이스라엘의 정치신학적 특징은 왕이 있기 전에 카리스마적 선지자와 종교적 예식을 주관하는 제사장이 있었다는 점이다. 왕정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율법, 즉 신성한 법 곧 신법(divine law)이 선지자에 의하여 주어졌다. 당시 중근동의 거의 모든 국가는 군주제였고, 군주제는 자연적인 질서라고 생각했다. 비록 왕이 오류가 있더라도 왕권에 대하여 저항하려 하지 않았으며, 왕권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유대의 군주는 자연적 질서에 속한 것이 아니다. 왕 제도는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제도였다(factitious man-made institution). 유대의 왕은 입법자도 아니었고, 하나님과 공동체 사이에서 생긴 최초의 중재자(intermediary)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백성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므로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유대인의 왕이 되었다. [Finer, The History of Government from the Earliest Times: Vol. 1 Ancient Monarchies and Empires, 238.] 실제로 역사 속에서 왕은 출애굽 이후 약 500년이 지난 후에 등장한다.
둘째로 중근동에서 유대 왕국은 역사상 최초의 “제한군주제”(limited monarchy)의 형태를 가진 나라였다. 중근동에서 이러한 제도를 가진 국가가 세워진다는 것은 혁명적 발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히브리인의 공동체에서 왕은 입법자가 아니었고, 입법자는 언약의 당사자이신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분화된 선지자와 제사장과 같은 존재가 왕의 이전에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왕은 신성한 존재도 절대적 존재도 아니었다. 중근동의 절대적인 신왕과 달리 유대 공동체에서 왕은 누구보다도 하나님 자신이셨고, 이후에 생긴 군주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하여 봉사하는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부왕(副王, viceroy)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시내산 언약은 선지자 모세를 통해 기록되었고, 왕과 모든 백성은 그것을 순종해야 했다. 나중에 중재자(mediator)로 왕의 역할은 중근동의 다른 신왕에 비해 부수적이었으며, 오히려 유해할(noxious) 수도 있었다. 오직 신법의 권위 아래서 왕을 비롯한 다른 권력 집단과 정치적 장치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Finer, The History of Government from the Earliest Times: Vol. 1, 238-240.]
셋째로 입법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왕도 법 아래에 있어야 했고 법에 복종해야 했다. 왕이 법을 넘어서는 전제적 위치에 나아갈 때, 선지자는 왕을 질타함으로 절대군주로의 진화를 막는 역할을 했다. 다윗의 시대에 군사의 숫자를 계수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정죄되었고, 이 사건은 7만의 이스라엘 사람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결과를 낳는다. 왕의 영광으로 여겨졌던 제국의 강력한 군대는 하나님이 왕이신 유대 왕국에서는 반대로 정죄의 대상이 되었다(삼하 24:1-25, 대상 21:1-27). 이처럼 율법 아래 있는 제한적 권세를 가진 군주의 위상은 후일에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가 지은 『법과 왕』(Lex Rex, 1644) [Samuel Rutherford, Lex Rex: The Law and the King, originally published 1644 (Moscow, Idaho: Canon Press, 2020).]이라는 저술로 나타났다. 그 핵심적 통찰이 “바로 법이 왕”이라는 가르침이며, “법이 왕에 우선한다”는 사상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율법이 존재하는 신정정치에서 군주의 권력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결과를 낳았다. 군주는 이전부터 주어진 법, 구체적으로 기록된 법에 얽매였고, 그것은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왕이 하는 일이나 백성이 하는 일은 이 법을 따르는 것이어야 했고, 법은 이를 규정했다. 왕은 선지자를 통해 받은 법을 기록하여 묵상하며 지켜야 했고, 그도 법을 시행하여야 했다. 유다의 왕은 법치의 고대적 사례이다. [Finer, The History of Government from the Earliest Times: Vol. 1, 239.]
넷째로 평등사회는 왕권의 약화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백성이 가진 의식의 자각으로 완성될 수 있다. 해방된 히브리인과 많은 종족은 이집트의 신과 군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작했다. 60만의 노예는 군사훈련을 받지도 않았고, 파라오의 군대 앞에서 심리적으로 무기력했다. 히브리 노예는 압제에 눌렸고, 짓밟혔고, 겁에 질렸고, 비굴하고 낙담했다. [Michael Walzer, Exodus and Revolution, 『출애굽과 혁명』, 67-77.]
해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랫동안 이집트를 추억하며 불평했다. 광야는 영혼의 학교로서 히브리인의 노예근성을 바꾸는 과정이었다. 하나님은 홍해에서 이집트 강군을 격파하고 시내산 안전한 곳에 이르러, 비로소 율법을 주시고 이스라엘이 언약에 참여하게 하신다. 언약을 맺는 사람들은 자유인이다. 노예는 강압과 압제(oppression)를 통해 발생하지만, 언약은 의지를 사용한 자발적 결단이 필요하다. 언약을 맺으며, 백성들은 “일제히 응답”했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라고 결정한다. 40년 이후에 맺어진 모압 언약에서 모든 백성의 남녀노소가 다 참여하고, 타민족과 종들까지 언약에 참여하여 의지적 결단을 내린다(신 29:10-13). [Walzer, Exodus and Revolution, 『출애굽과 혁명』, 97-101.] 이집트의 우상과 군대를 두려워하던 노예는 하나님의 영광과 언약에 동참하는 자유민으로 성숙해 나간다. 이것은 왕의 압도적인 절대권에 복종한 신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의 자유민이 됨을 보여준다.
다섯째로 자애로운 신법은 백성의 자유, 자영농을 보장하고, 경제적 자립을 추구할 수 있도록 소수에 의한 대토지 소유제를 거부하고 각자가 기업을 가지고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평안히 거하는 것”(왕상 4:25, 왕하 18:31, 미 4:4, 슥 3:10)을 이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건강한 자영농의 나라를 구성하고 예배와 삶의 경건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했다. 이를 위한 신분의 자유와 함께 경제적 풍요를 누려야 했다. 이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것이었고, 정치적 차원이나 신분적인 견지에서뿐 아니라 사회ㆍ경제적인 면에서도 풍요를 누리는 것이 배제되지 않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분배는 거룩한 백성의 기본적 환경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사회적 장치는 안식일 안식년 희년 제도와 토지정책에 의하여 광야에서 미리 그려지고, 가나안 땅에서 이내 시행되어야 했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이루어졌던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이다. [Walzer, Exodus and Revolution, 『출애굽과 혁명』, 125-134.]
출애굽의 과정은 혁명적이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에서 자유민으로 세워져 나간다. 시내산 언약은 이러한 변혁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혁명적 과정은 40년의 변화의 기간을 요구하였다. 광야는 변화의 과정이었고, 성숙의 교실이 되었다. 40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세대가 되어 약속의 땅으로 향한 진입을 바라보게 되었다. 언약 백성의 성숙은 무엇을 포함하여야 하는지, 출애굽기의 언약식은 레위기와 민수기의 말씀을 통하여 보충되고 갱신된다. 그리고 시내산 언약이 맺어진 후 38년이 지난 후 모압 평지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세대들은 두 번째 언약인 신명기를 통해서 언약을 갱신한다. 신명기 언약을 맺는 데까지 모세를 통한 선지자 정치를 관통하는 정치신학적 특징을 다음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