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목회의 시대적 요청
페이지 정보
본문
[한국교회의 본질적 목회를 고민하기 위해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모여 시작한 영성목회 포럼의 준비 모임에서 발표한 글들을 게재하고자 한다. 글을 게재하는 순서는 1. 유해룡 교수, 2. 김수천 교수, 3. 권진구 교수, 4. 오방식 교수, 5. 민경보 목사 순으로 하여 매주 게재할 예정이다.]
영성목회의 시대적 요청
유해룡 박사(장신대 기독교영성학 명예교수, 로뎀나무 도심영성공동체 대표목사)

유해룡 박사
1. 들어가는 말
영성사의 전통에 따르면 관상과 활동의 긴장관계가 조화롭게 극복될 때 건강한 목회가 형성된다. 기독교 영성사에서는 예수님을 둘러싸고 일어난 마리아와 마르다의 갈등적 사건을 중요한 예로 제시한다(눅10:38-42).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소위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반면에 마르다는 손님 대접을 위하여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 둘 중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삶의 방식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특정한 방식을 예수님이 선호했다라기보다 조화롭지 못한 삶의 방식을 짐짓 우려했던 것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는 분명히 우선순위가 있었던 것같다. 마리아 그 마음을 잘 헤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활동적인 삶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의 발치에 머무는 삶이 우선 순위적임을 알아차렸고, 예수님은 그러한 삶의 자세에 깊은 동감을 표하였다.1)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영성목회의 기본적 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성목회의 출발은 어떤 특정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목회방식으로부터 찾을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어떤 자세로 목회에 임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오늘날 목회자는 다양한 목회적 활동에 투신하고 있다. 그래서 목회자는 어떤 직업군보다 복잡다단하고 분주하기 그지없다. 즉 과도한 활동적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러한 과도한 활동은 목회자로 하여금 반드시 성직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목회자란 기능적 차원의 정체성을 암시하는 용어이며, 성직자는 존재론적 차원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용어이다. 성직자란 활동 이전에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머물러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성직자적인 정체성으로 목회적 활동이 조화롭게 자리를 잡을 때 비로소 영적 목회의 틀이 마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목회적 환경은 개별적으로 목회적 재능을 한껏 발휘해야 하는 경쟁구도 속에 놓여있다. 따라서 부름받은 성스러운 공동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에, 성직자적 의식과 인성을 형성시켜 가야 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여기서부터 영성목회의 위기가 촉발된다.
2. 개인적 경험을 중시하는 시대
우리는 지금 특정한 전통이나 권위에 자신의 신앙을 맡기기를 주저하는 세대에 살고 있다. 열린 사회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다양한 가치관을 접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교리나 권위에 의존하고 있는 제도권적인 종교에 대하여 큰 신뢰성을 두지 않으려 한다.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외적인 권위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내적 경험으로부터 찾으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기에는 적지않은 부담감을 느낀다.
첫째는 누구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주제적인(unthematic) 내적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그 경험을 누구나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자기 안에서 어떤 경험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비주제적인 내면의 경험을 주제적(thematic)인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돌봄이 필요하다.
둘째 자신의 경험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라도, 그 경험을 지속적인 영적 성장의 동력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경험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 역시도 능숙한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헨리 나우웬은 오늘의 이 세대의 사람들을 핵 인간이라고 정의하면서, 핵 인간의 특징을 역사적 단절, 단편화된 이데올로기, 새로운 불멸에 대한 추구 등이라고 한다.2) 현대인들은 연대감이나 연속의식보다는 ‘지금 여기(the here and now)'라는 순간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3) 핵 인간은 시대를 초월하여 타당한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우선적으로 가치있게 느껴지는 경험만이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된다4).
인간은 불멸의식이 분명할 때 ’오늘 여기에‘가 의미가 있으며 창조적 욕구가 발동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전통적인 믿음이나 권위에 대하여 연속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 속에서 불멸의식을 찾을 수는 없다. 각 개인은 자신의 경험 안에서 불멸의식을 찾으려 한다.5) 그래서 현대인들은 보다 내면적인 실체,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 존재의 근원 등에 더욱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 사회에 명상이나 정신훈련 또는 묵상을 위한 피정센터, 선이나 요가센터들이 곳곳에서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 그러한 시대적 성향을 증명해 보인다고 할 수 있다.6)
현대의 고독한 군중들은 점점 더 내향성(inwardness)을 지향하고 있다고 헨리 나우웬은 지적한다. 그들은 보편타당한 외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대신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믿고자 한다.7) 이 세대는 개인적인 것에 절대 우위를 부여하는 세대이며, 자아 속으로 움츠러드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세대이다. 이 세대들은 ‘바깥 어딘가’ 또는 ‘위 어딘가’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면, ‘내면 어딘가’에서 의미있고 확실한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고,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내향성은 반권위주의를 지향하며 동시에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모순되게도 물질적인 안락함이나 욕구에 함몰되기도 한다.8)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향적 세대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내면에 계신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그 다양한 경험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여 설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내적인 상처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혈연 지연적인 닫힌 사회로부터 무한 경쟁의 열린사회로 치달으면서 현대인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깊은 패배감과 좌절감을 자주 경험한다. 동시에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건강한가, 즉 정체성 확인, 의식적 삶(사명의식)에 대한 재확인, 내적 상처에 대한 치유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경쟁적이고 개인주의화 되어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심층심리학적인 이해가 보편화 되어가면서 사람들은 자신을 보다 내면적으로 이해하고 심리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비교적 자신의 운명이 집단체제에 의해서 결정되던 시대와는 달리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하는 열린 사회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한 현대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자아의 신비를 일깨워 주고, 자아의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안내자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고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는 이러한 서구 세계의 모습을 보면서 “아마 백 년 전에 멘토링(개인지도)에 관한 책은 필요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18세기의 출판업자는 그런 책을 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내용이야’라고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렸을 것이다”고 했다.9)
이러한 경우는 우리 사회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혈연지연으로 얽혀진 농경사회에서 자라난 세대의 사람들은 특별히 개인적인 도움을 목말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로간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통하여 혹은 의도적인 만남을 통하여 친밀감을 형성해 갔으며, 그리고 서로의 생활방식을 익혀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워 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농장이나 일터 어디에서나 서로가 멘토링(mentoring)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특히 대가족을 이루어 살던 시대에는 가족들간의 멘토링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가족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서로간에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공동체의 구성원들 간에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익혀왔다. 특히 장인(匠人)들의 세계에서는 가장 중요한 학습방법이 멘토링이었다. 개인적인 훈련과 학습을 통해서 독특한 기술이 전수되었고, 그 세계에서 필요한 ‘생활방식’을 배워나갔다. 교육에 있어서도 소수의 학생이 한 스승 밑에 장기간 거하면서 인격적인 교류를 통해서 학문을 전수받았다.
이동이 활발한 도시문화가 전개되기 전의 교회에서는 개인적인 만남을 통한 영적 돌봄이 수시로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 마치 전통적인 수도원에서 장상(superior)들의 지도를 받아 수도사들이 자신들의 신앙인격을 형성했던 것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18세기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목회를 하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그의 부인 사라 에드워즈는 그들의 집에 한 명 이상의 ‘제자’들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 제자들은 조나단 목사의 집에서 충분한 시간을 통해 결혼의 의미, 개인의 영적 통찰력, 목회자의 역할등을 배워 나갔다고 한다.10)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은 집단적이고 대중적인 신앙교육에 익숙하다. 대형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소형교회 역시 그 목회방식이 양적인 성장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을 이끌어 가는 방식에는 능숙하다. 반면에 개인의 내면세계에 주위를 기울이면서 세세한 영적 돌봄을 안내해 주는 일에는 미숙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일들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3. 목회적 환경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
미래학자들이 예측하는 미래적 환경에 귀를 기울여 보자.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대량생산적인 산업구조로부터 다양성과 개별성이 매우 존중되는 AI 시대의 부상으로 사회는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다. 집단을 위하여 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던 체제로부터, 개성이 인정되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사회로 거듭나고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선택을 인정하고 열어놓는 공동체만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지도체제 역시 명령 하달식의 피라미드식 체제로부터 상호협력적인 네트워크식 구조로 바뀌어 가고 있다. 통제하고 명령하는 군림하는 지도체제로부터 기능상 조정하고 감독하는 관리체제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 남성지배구조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이 부상되고 있다. 생산업체 위주의 산업구조가 정보분야의 산업구조형태로 전환되면서 여성들의 공적 영역의 진출이 두드지고 있다.11)
그 동안의 성장분위기나 열의가 하강국면에 이르고 있는 작금의 교회현실을 사회 심리적 측면에서 들여다 본다면, 그 원인을 변화되어 가고 있는 새로운 물결에 대한 부적응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그 동안 교회의 지도력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하에서 유지되어 왔다. 그런 교회일수록 빠르게 성장했고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한 곳에 속한 청중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그러나 자의식이 점점 팽창되어지고 AI와 넘쳐나는 정보사회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중앙집권적 체제가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개별적인 목소리가 그 이전보다 훨씬 강하게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지도력의 약화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지도력을 요구하는 목소리이다. 개인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상호협력적인 지도체제로 전환되면서 목회자가 돌봄을 겸한 관리자로 머물러 있을 때 새로운 지도력을 얻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 동안 교회는 지도력의 이중적인 체계를 유지해 왔다. 관리중심의 지도체제와 섬김중심의 지도체제이다. 남성들은 주로 피라미드식 관리체제에 익숙하여 그러한 방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여성들은 주로 섬김의 현장에서 그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이러한 이중적 체제가 이제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역할이 신장되면서 남성들의 지배구조적인 관리체제가 도전을 받고 있다.
목회자가 이러한 갈등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조정하지 못하면, 심각한 좌절과 실패감에 직면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목회자는 주도적 지도력을 상실하고, 청중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새로운 목회방식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을 조성하고 그 결과로 지도력을 얻은 청중들은 스스로 만족하기보다는 오히려 모순되게도 영적인 결핍을 호소하고 그 책임을 목회자에게 떠넘긴다. 그것은 마땅한 결과이다. 목회는 목회자가 축을 이루고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대안적 방식을 생각해야 하는가? 평신도 지도자들을 적극적으로 훈련시키 목회영역의 파트너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간의 결핍된 부분을 보완해 가는 것이다. 여기서 비로소 진정한 목회영역을 펼쳐갈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게 된다. 실제적으로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가 목회적 연합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럴 때 시대적 요청에 맞는 영성 목회의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다.
4. 나오는 말
그 동안 교회는 자주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를 듣곤했다. 그것을 하나의 영성목회를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들어도 좋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초대교회도 하나의 전환점에서 새롭게 형성된 영성 공동체이다. 초대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초대교회와의 갈등관계에 있었던 유대주의를 들여다 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갈등구조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직시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당시 상당히 왜곡되어 가고 있던 불만스러운 유대공동체를 새롭게 개혁하고, 영적인 개혁을 이루기 위한 대안공동체를 필요로 하였다. 그 결과로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대교와 초대교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삼자의 관계를 유비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은 기성목회'와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대하는 영성목회'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이 '불만스러운 모습을 직시하고 있는 목회자'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성경은 유대주의의 부정적인 부분과 그것을 극복하고 새롭게 형성된 초대교회의 영성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잘 전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파악한 개혁해야 할 유대주의의 특성은 이렇다.
첫째, 형식주의적이고 위선적이었다. 둘째, 권위주의적이었다. 셋째,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넷째, 분당심과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다섯째, 소유지향적이었다.
당시 유대주의적인 요소가 오늘 우리의 현실 교회의 모습과 적지않게 닮아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부분에서 우리 교회의 모습이 훼손되어 있다. 이 훼손된 모습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한 동기로부터 영성목회가 절실하다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즉 영성목회의 근본 목표가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목소리이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행하셨다. 그것을 오늘 교회에 재현하는 행동으로부터 영성목회의 목표와 내용이 분명해진다.
예수님이 유대주의를 극복하고 재형성한 '초대교회 영성의 특징'은 이렇다. 첫째, 형식파괴라고 할만큼 내적 자유함이 있었다. 둘째, 왜곡된 종교적 권위주의 대신에 사랑과 섬김의 길을 제시했다. 셋째 ,기득권적 집착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초연함의 소중함을 전해주고 있다. 넷째, 분당심과 편당심으로부터 포용과 관대함의 공동체였다. 다섯째, 종교적 의와 자만심 대신에 지극히 겸손함과 자기비움의 삶이 있었다. 여섯째, 성취지향적이거나 소유지향적이기보다는 존재지향적이었다.
오늘 우리의 청중들은 변화되어 가는 사회구조를 직시하면서 스스로 엄청난 의식의 전환을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당장 변화된 행동을 보여주고 있지는 못해도, '변화되지 못한 교회의 모습'은 직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이 하나의 영성목회로 돌아가라는 목소리로 들어도 좋다. 만약 이 목소리를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해 버리고, 영성목회라는 새로운 목회방식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목회는 더 큰 장애물에 직면할 것이고, 동시에 더 큰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
각주
1) 영성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수도원의 역사는 관상과 활동의 변증법적인 발전과 조화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수도원적 신학에서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선택적 인물로 보지않고 조화로운 관계로서 해석하곤 했다.
2) Henri Nouwen, '상처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 최원준 옮김 (서울: 두란노, 1999), p. 19.
3) 위의 책, p. 20.
4) 위의 책, p. 24.
5) 위의 책 pp. 26-27.
6) 위의 책, p. 30.
7) Rogers, On Becoming a Person (Houghton Mifflin, 1961), p.26을 '상처입은 치유자' p. 30에서 인용함.
8) '상처입은 치유자', pp. 42-45.
9) Bobb Biehl, '멘토링(Mentoring): 사람을 세워주는 12가지 원리' (서울: 도서출판 디모데, 1998), p. 26.
10) 위의 책, p. 27.
11) John Naisbitt, '메가트렌드 아시아', 홍수원 옮김 (서울: 한국경제신문사, 1996), 1, 2, 6, 7장 참고.
- 이전글WEA 논쟁과 개혁주의 선교신학의 정체성과 그 역할 (1) 25.09.04
- 다음글[민종기 목사의 성경과 정치신학] 제2장 “하나님의 아들들”의 타락과 대홍수 – V. 초자연 세력의 반역과 대홍수 심판 25.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