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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목사 자서전 “이 풍랑 인연하여서”] 나의 수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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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광현 목사 자서전| 작성일2025-02-03 | 조회조회수 : 39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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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목사 자서전 “이 풍랑 인연하여서”를 가족의 허락을 받아 KCMUSA에서 연재한다. “안동교회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김광현 목사가 직접 쓴 이 자서전은 출생, 그리고 신학공부와 초량교회를 거쳐서 안동교회로 부임,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독립 투쟁으로 감옥살이까지 하고, 남조선과도입법의회에 참여하는 등 목회자만이 아니라, 애국자로서 한평생을 산 고 김광현 목사의 삶의 생생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 편집자주]



나의 수학함 


내가 처음에 입학한 학교는 대구 도당회가 경영하는 희원학교였다. 나는 시골에 있었을 때 교회에서 세운 학교에서 배운 것이 있어서 2학년에 편입했다. 희원학교는 내가 6학년 때 희도보통학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희원학교로는 제19회요, 희도보통학교로는 제1회 졸업 생이 된다. 그때 내 기억에 남는 큰일은, 내가 3학년 때 (1923) 대구 남성정교회에서 이만집 목사의 자치파 소요가 일어난 것이고, 6학년 때(1926) 순종황제 인산(因山)으로, 달성공원에서 서울을 바라보고 통곡하던 6‧10만세 사건이다. 


그리고 다음에 수학한 학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경영하는 계성중학교였다. 나는 그때 노동부에 들어가서 학비를 벌어 가면서 공부했다. 일은 주로 강당 청소를 맡아 했다. 내가 계성학교 재학 때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박태준 선생이 지도하던 합창부에 들어가서 각 교회로 다니며 노래 부르던 일과 학교 승격을 위하여 시험 보던 일, 3학년 때(1929) 광주학생사건을 겪은 일, 그리고 처음 입학 때는 40명이나 되던 학생이 졸업 때는 겨우 3명뿐이었다는 것 등이다. 


나는 계성학교 제20회 졸업생이다. 내가 계성학교를 마쳤을 때,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법학을 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내가 일본으로 간 것이 학업의 길로는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나는 그 돌아가는 길에서 회심케 되어 신학을 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일본 자유 메소디스트 교회의 노방 전도대에서 한 중년 과부가 들려준 간증에 감동되어 회심케 된 것이다. 나는 그 후 고베 중앙신학교 재학 때, 그 부인을 찾았다. 이노우에(井上)라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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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전문학교 응원단 모습


신학을 할 뜻을 정하고 보니 숭실전문학교를 거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귀국하여, 전에 나에게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선해 주셨던 계성학교 현거선(H. H. Handerson) 교장님을 찾아뵙고 다시 주선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현 교장은 내가 신학하겠다는 것을 기뻐하시면서, 다시 주선해 주셨다. 그 사실을 아버지께 고하자 아버지는 나를 낳은 후 제일 먼저 기도한 것이 목사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 소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며 함께 기도하자고 하셨다. 그때 아버지께서 감사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후 나의 학업은 숭실전문학교에서 평양신학교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그때가 내 일생에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때 평양은 우리나라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선교회의 중심 인물들이 거의 다 그곳에 있었고, 한국 교계를 움직이던 지도자들도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때 숭실전문학교나 평양신학교에서 사귀던 학우들은 모두 뒷날 내가 교계에서 활동할 때의 동료들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평생 반려가 된 아내 최의숙(崔義淑)도 거기서 만났다. 그녀는 그때 숭의여학교를 마치고 평양여신학원에 재학중이었다. 


내가 숭실전문학교에 재학 중일 때 한국 교회 사상 최대의 시련사건이었던,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났다. 신사참배 문제는 일본 군국주의가 팽창되어감에 따라, 한국인을 일본인화시키려는 수단으로 실시한 정책이었다. 그들은 그 정책의 실시를 평양에서 착수했다. 그래서 1935년 11월 4일에 평안남도 지사 야수다케(安式貞夫)는 자기 관내 학교장들을 소집해 놓고, 학생들을 인솔하여 신사에 참배할 것을 지시했다. 모든 공립학교 교장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었다. 기독교 학교 교장 중에도 선교사가 이사장이나 교장인 학교가 가장 문제였다. 


그때는 미국 선교사 하면 치외법권을 부여받고 있는 것처럼, 일제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을 때다. 그러니 그 문제가 그것으로 고요히 그칠 리가 없다. 만일 그 문제가 평양에서 좌절되어 실시를 못 하게 되면, 전국적인 실시도 실패하고 만다. 그러니 그 문제의 거사 가 일개 도지사의 단독으로 한 처사라고 볼 수 없다. 적어도 총독부 당국과 조선군 사령부에서 정치, 군사, 외교 등을 고려한 다음에 충분한 계획하에 단행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야수다케 지사나 총독부 당국의 태도가 갈수록 강경해졌다. 숭실전문학교 이사장 마포삼렬(S. A. Moffet) 박사나 학교장 윤산온(G. S. McCune) 박사의 태도도 매우 진지했다. 그래서 반 년 남짓 끌며, 그 일의 해결책을 모색케 되었다. 그때 나는 방과 후마다 허일(H. Hill) 목사가 설립하는 고등성경학교 일을 돕고 있었다. 


일제 당국은 그때까지는 교회나 신학교에는 참배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 학교에 대해서는 억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도리어 1936년 6월에는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 등의 학교장을 파면하고, 1938년 2월에는 그들 학교에 폐교의 비운을 안겨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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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광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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