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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목사 자서전 “이 풍랑 인연하여서”] 나의 자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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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현 목사 자서전| 작성일2025-01-31 | 조회조회수 : 28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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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목사 자서전 “이 풍랑 인연하여서”를 가족의 허락을 받아 KCMUSA에서 연재한다. “안동교회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김광현 목사가 직접 쓴 이 자서전은 출생, 그리고 신학공부와 초량교회를 거쳐서 안동교회로 부임,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독립 투쟁으로 감옥살이까지 하고, 남조선과도입법의회에 참여하는 등 목회자만이 아니라, 애국자로서 한평생을 산 고 김광현 목사의 삶의 생생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 편집자주]


제1부 초기 목사가 될 때부터 6‧25전쟁까지 1941~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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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합장로교 기관지에 실린 가족 사진 9‧28수복이 되어 돌아와 보니 안동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은 움막을 짓고 생활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은 더욱 커져 교인들은 한 마음으로 뭉쳤다. 그때 미국 연합장로교 기관지 "프레스비터리언 라이프"에서는 교회 복구 사업에 바쁜 나의 사진을 찍어 소개했다



I. 목사가 됨 


1. 신학을 하게 됨 


나의 자라남 


나는 1913년 9월 22일에 경북 의성군 봉양면 삼산동에서, 아버지 김형동(金亨東) 장로와 어머니 이남이(李南伊) 권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두 분은 결혼하신 지 6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으셨다. 가족들 모두가 마음을 졸이던 중에 내가 태어났다. 그때 아버지는 26세, 어머니는 23세였다. 내가 태어난 동네인 삼산동에는 내가 나기 4년 전인 1909년에 이미 교회가 섰다. 그 교회는 설립되자마자 곧 교회 안에 학교도 부설했는데, 아버지는 그 교회의 처음 교인 중의 한 분이셨다. 그러니 나는 태중 교인이 된 셈이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어지간한 집 자녀들이면 다 받던 서당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시고, 가사 일을 도와야 했다. 할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셔서,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안동 김씨라는 자존심만은 잃지 않으시고, 늘 말이나 몸가짐을 조심하셨다. 교회에 나가게 되신 다음에는 공부를 많이 못 하신 한을 성경 읽는 것으로 푸실 양으로 틈만 나면 성경을 읽으셨다. 교회 일에도 열성적이어서, 모든 교인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셨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려니 기억나는 것이 있다. 그때 그 부설학교 학생이었고, 뒤에 의성읍 교회의 장로와 광복 후에 초대 의성읍 부읍장을 지낸 정해동 장로가 들려준 이야기다. 정 장로가 그 학교 학생이던 시절, 나이가 많은 학생들은 학교에서 함께 자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가시던 아버지가 밤마다 주무시러 다시 오셨다고 한다. 모두 이상해서 물었으나, 아버지는 좀처럼 대답을 않으셨다. 거듭 물으니 그제야 하시는 말씀이 성경에 요셉도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시더라는 것이다. 그 후에 내가 태어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의 이름을 '광현(光顯)'이라고 지어 주셨다. '현'자는 안동 김씨인 나의 항렬자이지만 “광현”이라고 지으신 데에는, 아버지가 내게 가지셨던 뜻과 기대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버지는 후에 그 교회의 영수(領袖)가 되셨다. 성경지식이 풍부하셔서 대화에 성경 말씀을 많이 인용하셨고, 농촌 교회여서 자주 하게 되는 설교도 잘하셨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보면, 김현준이란 분과 함께 그 교회 신축 때 공임을 모두 담당하셨다고 한다. 부설학교 운영에도 열성적이어서, 새 선생을 맞을 때는 늘 앞장서셨다. 당신이 그처럼 유지하기 위하여 애쓰셨던 그 학교는 막상 당신의 아들인 내가 공부하게 될 때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니 아버지의 실망이 어떠하셨겠는가. 아무리 정든 동네이고 모교회일지라도 그곳에서는 아들을 교육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신 아버지는 내가 9세가 되던 해에 혼자 대구로 가셔서, 장차 식구들이 모두 함께 이사할 준비를 하셨다. 그리고 다음 해에 다시 오셔서 봄에는 나를, 추수 후에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대구로 데려가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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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고 김광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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